영애씨들! 힘들어해도, 서툴러도 괜찮아요

남지은 2021. 7. 3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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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다큐드라마 주연, tvN 성장 이끌어
힘겨운 여성의 삶 씩씩하게 그려내
새 프로서 '싱글맘 김현숙' 육아분투
"모두 힘냈으면, 해피엔딩 만듭시다"

[한겨레S]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16. 막돼먹은 영애씨

2007년 시작해 12년간 방영한 <티브이엔>의 개국 공신. <막돼먹은 영애씨> 초창기 출연자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현숙, 유형관, 임서연, 정지순, 김산호, 윤서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초창기에는 사실감을 높이려고 실제 사무실을 임대해 ‘아름다운 사람들’로 꾸몄다. 세트 촬영이 없었다. 티브이엔 제공

“이젠 가장이니까요. 열심히 돈 벌어야죠. 하하하.”

배우이자 코미디언 김현숙한테 싱글맘 육아 분투기 <내가 키운다>(제이티비시) 출연 이유를 묻자 이 말부터 꺼냈다. 수화기 너머 이 한마디에 가슴이 저릿해 왔다. 그가 힘들어 보여서? 아니, 김현숙은 여전히 고군분투하며 오늘을 잘 살아가고 있어서다. 육아에 소질 없다고 말했던 그가 하나하나 배워가며 가장으로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은 비슷한 입장의 싱글맘을 다독였다. “힘들어해도 된다고, 서툴러도 괜찮다고, 모든 건 차차 나아질 거라고. 우리 모두 힘내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여러분 해피엔딩을 만듭시다.”

그가 말하지 않을 뿐, 하루에도 열두번 울컥하는 순간은 찾아올 것이다. <내가 키운다>에서도 “너만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 살자”는 아빠의 그 말이 고마워서, 웨딩 앨범은 “(남편 사진만) 오려내고 보관하면 된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해주는 엄마가 고마워서 그는 눈물을 쏟고 만다. 부모의 에너지로 다시 충전하는 그의 모습은 또 그렇게 순간순간 우리를 보듬는다. <내가 키운다>의 여러 출연자 속에서도 유독 김현숙한테 마음이 가는 이유는, 그가 한때는 수많은 싱글을 위로했던 ‘우리들의 영애씨’였기 때문이다.

이영애는 온갖 불공정을 겪으면서도 “아니요”를 말할 수 있던 멋진 언니였다. 버스에서 변태를 응징하기 직전의 모습. 프로그램 갈무리

초창기 tvN 살린 개국공신

김현숙의 일상은 ‘이영애’를 그리워하는 현실의 ‘이영애들’도 함께 다독였다. 이영애는 김현숙을 배우로 완성한, 2007년 막을 올린 <막돼먹은 영애씨>(티브이엔·tvN) 주인공이다. 결혼 안 한다고 엄마가 잔소리하고, 외모 때문에 상사가 놀려도 되레 그들에게 맞서며 씩씩하게 잘 사는 모습으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2019년 시즌 17 이후 ‘영애씨’ 소식을 들을 수 없다. 티브이엔이 공식 종영을 발표한 것도 아니어서 팬들 사이에서는 개국공신을 푸대접한다는 불만도 나온다. 티브이엔은 19금 예능도 만들었던 ‘쌈마이’ 채널로 시작해 <막돼먹은 영애씨>가 인기를 얻으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최소한 다음 시즌에서 시청자와 이별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품, 출연진,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을 좋아해준 시청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 같아요.”(한 40대 팬) 어쩌면 <내가 키운다>는 김현숙이 드라마 팬들에게 선물하는 또 다른 의미의 시즌 18인지도 모르겠다.

<막돼먹은 영애씨>는 12년간 주요 출연자가 거의 바뀌지 않은,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시즌제 드라마다. 그중에서도 시즌 1~10은 특히 재미있다. 다큐드라마를 지향한 시즌 1~3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파격적인 시도였다. 주로 비디오자키(VJ)들이 사용하는 6밀리 카메라로 촬영했다. 이영애가 다큐멘터리처럼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인터뷰 장면도 나온다. “처음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담당 피디한테 다큐드라마가 뭐냐고 묻기도 했죠. 해봐야 알 것 같다는 답이 지금도 기억나요. 하하. 그 정도로 모험이었어요.” 방송이 나간 뒤 이어진 호평에는 소재는 물론 캐릭터의 사실성도, 굉장히 현실적인 상황 묘사도 작용했다. 주요 배경이었던 간판디자인 회사 아름다운 사람들은 실제 건물을 빌려 사무실로 꾸몄다. 세트가 아니다. 이영애의 집도, 변지원의 반지하 집도 진짜 집이다. 당시 출연진은 각자 자기 핸드폰을 들고 촬영했다.

꽃무늬 벽지에 개성 뚜렷한 침구까지. 사실적인 에피소드와 함께 장소, 소품 하나에도 우리가 사는 ‘진짜’ 모습을 반영했다. 프로그램 갈무리

캐릭터를 다루는 솜씨는 다시 봐도 놀랍다. 이영애는 극 중에서 뚱뚱하고 못생긴 설정으로 나온다. ‘살과의 전쟁’을 벌이는 이영애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뱃살을 이리저리 잡으며 한숨을 쉰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불을 끌 때 일어나기 귀찮아 발끝을 최대한 뻗는 모습을 보면, 괜히 찔린다. “초창기 티브이엔이었으니까 가능했어요. 만약 지금 극 중 캐릭터가 브래지어만 입고 뱃살을 이리저리 만진다면 그게 현실적인 디테일이라고 해도 방송 못 나갈걸요?” 유형관 사장의 성희롱적 발언은 특히나 시대착오적이고 불쾌하다. 캐릭터의 성격을 확실히 잡아주면서 <막돼먹은 영애씨>의 리얼리티는 한껏 살아났지만, 지금 보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시즌 10을 넘어가면서는 더 이상 ‘막돼먹지’ 않게 됐다. 자본이 투입되고 감수성을 생각해야 해 에피소드가 주로 영애의 연애담에 집중됐다. <막돼먹은 영애씨>는 기러기 아빠 유형관 사장, 아내가 떠나는 아픔을 겪은 윤서현 등 이영애의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여러 인물의 깊은 이야기를 전하는 풍성한 드라마였는데, 고유의 색깔을 잃었다. 시즌 10이 넘어가면서 최신 휴대폰에 외제 차 등 간접광고(피피엘·PPL)도 늘었다. 초창기 팬들은 아쉬워했지만, 10시즌 이후부터 본 시청자들은 그 나름대로 재미있어했고, 꾸준히 2~3%대 시청률을 유지하며 제작비 대비 효녀·효자 노릇을 했다.

지금 시즌 1~10을 다시 보면 새로운 게 보인다. 이영애는 그 시절에 2021년을 꿰뚫고 있었다.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다양한 일을 그는 이미 경험했다. 이영애의 원래 꿈은 유학 갔다 와서 멋진 디자이너가 되는 거였다. 누구나 현실보다 더 큰 회사를 동경할 때가 있다. 이영애도 큰 디자인 회사에 취업하려고 업무 시간에 몰래 면접을 보러 가지만 스펙으로 무시를 당한다. 이영애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다. 하지만 스펙으로 그의 능력은 검증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재개발을 노리고 대출받아 빌라도 샀다는 사실. 이, 영애 대체 뭐지?

‘막영애’ 초창기 장면. 다큐멘터리처럼 이영애가 제작진과 인터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방송 화면 갈무리

불공정에 ‘아니요’ 외친 영애씨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이영애는 이미 보여줬다. 그리고 말한다. 용감하게 대응하라고. 그는 버스에서 치한을 만나자 즉시 손을 낚아채며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친다. 치한이 계속 발뺌하자 버스에서 끌어내려 가방으로 때리며 응징한다. 사장이 친구이자 동료인 경리 변지원한테 영업일을 시키자 “가지 마. 네 일도 아닌데 네가 왜 가!”라고 말하고, 사장이 무능한 광고주(의뢰인) 아들을 신입 디자이너로 뽑자 “이 일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왜 뽑냐”고 낙하산 인사에 항의한다. 물론 사장이 하고 싶은 대로 되지만, 이영애는 모두가 “네” 하는데 혼자 “아니요”를 말하던 멋진 언니였다.

알고 보면 우리에게 힘을 준 이영애는 김현숙에게는 힘든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현실감을 위해서 시즌 내내 살을 빼지 않았고, 결혼할 때도, 임신했을 때도 제작진과 시청자의 눈치를 봤다. 당시에는 이영애의 결혼이 드라마의 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영애가 주는 힘을 잘 알기에 12년을 이영애로 살았다. 거절해온 육아 예능을 싱글맘이 된 뒤 받아들인 것도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였다. 김현숙은 그때도 지금도 우리에게 힘을 주고 있다. 받기만 해도 될까? 지금 김현숙의 모습이 너무 멋지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키운다>에서 김현숙은 아들 하민과 부모와 평상에 둘러앉아 손수 만든 잔치국수를 먹는다. 하민이 부추를 듬뿍 넣은 국수를 입안 가득 밀어 넣는다. 마치 ‘엄마 나 씩씩하게 잘 먹고 잘 클게’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즌 1에서 이영애가 뭐 하나 마음처럼 안 되는 상황에서도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는 장면에서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먹는다는 건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이다. 힘을 내 살아보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김현숙도, 이영애도, 우리도 잘 먹고 힘을 내 살아보자.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 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
도둑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변지원의 평소 집 상태였던 설정이 큰 웃음과 은근한 ‘공감’을 준 장면. 프로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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