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 확산에도 '사무실 출근' 밀어붙이는 월가
"고객관리 위해 대면 영업 필수
원격 근무로 사이버 공격 노출"
골드만삭스·JP모간 등 속속 전환
애플·구글 등 IT업계 한 달 연기
실리콘밸리로 인재 이탈할 수도
인턴 "얼굴 맞대고 업무 배워 좋아"
저연차 등 재택 선호 직원들 반발
월스트리트 대형 투자은행들이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에도 직원들의 사무실 복귀를 밀어붙이고 있다. 월가를 상징하는 동상 ‘돌진하는 황소(Charging Bull)’와 같은 기세다. 미국 주요 기업이 사무실 출근 시점을 잇따라 연기하는 것과 대조적인 행보다.
투자은행들이 ‘정상 출근’을 고수하는 배경은 대면 영업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있다. 새로운 고객 확보 등을 위해서는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댄 영업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업무 적응이 필요한 일부 인턴은 사무실 출근을 환영하기도 하지만 반발 움직임도 적지 않다. 투자은행의 ‘출근 강행’으로 인재들이 회사를 떠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백신 맞고 사무실 출근하라”
블룸버그통신은 29일(현지시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최근 코로나19 백신 접종자도 실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고 권고한 뒤에도 월가 투자은행들은 출근과 관련한 어떤 정책 변경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골드만삭스와 JP모간은 백신 접종을 완료한 직원들은 실내에서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들 은행은 1~2개월 전부터 직원들을 사무실로 출근시켰다. 최근 델타 변이 확산 등에도 직원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진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모건스탠리는 자사 직원들에게 백신 접종을 권고하면서 ‘노동절(9월 6일)까지 출근하라’는 지침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백신을 맞고 사무실로 돌아오라는 주문이다. 비교적 유연한 출근 정책을 펼치고 있는 씨티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씨티그룹 인턴 550여 명은 최근 사무실 출근을 시작했다.
미국 보험사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은 직원들의 사무실 출근일을 9월 14일로 못박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지만 재택근무만으로는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코로나와의 공존’을 택한 금융사가 늘어나는 추세다.
CEO 직접 나서 출근 종용
주요 투자은행은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나서 직원들의 사무실 복귀를 종용하고 있다. 제임스 고먼 모건스탠리 CEO는 “뉴욕에 있는 레스토랑에 간다는 것은 사무실에도 출근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직원들이 출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은 뒤 적극적인 대면 영업을 주문하는 리더도 있다.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CEO는 “백신을 맞았다면 비행기를 타고 고객을 만나러 가라”고 했다.
투자은행 CEO들이 이처럼 정상 출근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고객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화상회의 등 비대면 만남으로는 얼굴을 맞대는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유·무형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이들 CEO는 대규모 거래가 매일같이 이뤄지는 업종 특성상 대면 만남을 통해 사이버 보안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JP모간은 지난해 연례 보고서에서 “직원 상당수가 원격근무에 들어가 화상회의 플랫폼 사용이 증가하면서 사이버 공격에 대한 노출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CNN은 “은행 업무의 핵심은 대면 사업”이라며 “경쟁이 치열한 월가의 어느 누구도 느린 와이파이 연결 때문에 거래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상 출근에 대한 투자은행들의 ‘집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재택근무의 편리함을 맛본 직원들이 코로나19 확산세에 사무실 출근 날짜를 뒤로 미루고 있는 실리콘밸리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CNN은 “월가 투자은행이 출근 재개를 너무 공격적으로 강행하면 실리콘밸리 등에 인재를 뺏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애플, 구글 등 미국 대형 IT 기업은 사무실 출근 시점을 오는 10월로 한 달가량 연기했다. 애플은 10월 이후에도 재택근무와 출근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근무 방식’을 채택할 방침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이 같은 유연근무는 월가 투자은행 직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투자은행 직원들이 근무 환경이 유연한 회사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면 앞으로 10년간 이들 은행의 근무 방식도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직원들 반응은 제각각
투자은행 출근 재개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최근 여름 인턴십을 시작한 골드만삭스의 한 예비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메일, 화상회의가 아니라 회사에 출근해 팀 선배들과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는 것이 정말 흥미롭다”고 말했다. JP모간의 한 인턴도 “프로젝트와 관련해 질문하고 싶을 때 바로 뒤에 앉은 직속 상사에게 물어볼 수 있다”며 회사 출근을 만족스러워했다.
반면 저연차 직원들은 반발이 심하다. 금융권 관계자는 CNN에 “많은 애널리스트와 저연차 직원들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며 “도시 외곽에 사는 사람들은 회사로 돌아가려는 욕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아이 돌봄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한 직원들도 사무실 복귀 방침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헤지펀드 운용사 스카이브리지캐피털의 한 직원은 “중간 관리자나 어린 자녀가 집에 있는 직원들은 보육 환경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출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사무실 출근에 반대하는 직원들은 올 상반기 재택근무에도 회사가 좋은 실적을 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JP모간은 지난 2분기 119억5000만달러(약 13조7000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지난해 같은 기간 46억9000만달러에서 2.5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골드만삭스도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지난 2분기 매출은 153억9000만달러로 시장 예상치(120억4000만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여러 논란 속에서 직원들의 사무실 출근을 강행하는 월가 투자은행들이 최근 코로나19 확산세에 다시 재택근무로 전환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델타 변이 확산 등으로 사태가 심각해지면 투자은행들도 결국 사무실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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