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버리고 모험 택한 작가들.."나를 지우니 예술이 왔다"

전지현 2021. 7. 3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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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길후, 기존 작품 소각후
이름까지 바꾸고 열정 불태워
새로운 추상표현주의로 변신
조각가 최수앙, 손목 인대 끊어져
극사실주의 대신 인체 해부 조각
조각·회화 경계 선 신작 선보여
작업 중인 조각가들의 근육과 뼈를 형상화한 작품 앞에 있는 최수앙 작가. [사진 제공 = 학고재 갤러리]
김길후 작가(60)는 마흔 살을 앞둔 1999년 기존 작품 1만6000여 점을 불태워버렸다. 사실주의, 민중미술, 추상표현주의, 구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지만 '내 예술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어떤 시류나 화풍에 영향을 받는 게 싫어서 '아는 것을 다 잊어버리자'는 결심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2000년부터 3년간 사람을 안 만나고 홀로 작업실에서 찾은 답은 '블랙 페이퍼'였다. 흰 종이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검은색은 색채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그는 "어떤 색을 고를까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혼란이 사라졌다"면서도 "검은색은 다루기 어려워 절제된 붓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3년에는 김동기에서 김길후로 개명해 새로운 작가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조각가 최수앙(46)은 2018년 여름 양쪽 손목 인대가 끊어져 외과 수술을 받았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석고 원형을 깎아내다가 무리가 왔다. 재활 기간을 거치면서 기존 작업 방식을 되돌아보게 됐다.

피부 주름까지 치밀하게 살려 진짜 사람 같은 극사실주의 조각을 제작해 주목받았지만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본질을 살리는 조각들을 실험하게 됐다. 그는 "사실적으로 재현된 형상은 상징과 서사가 너무 강했다. 그간 작업과 거리를 두고 열린 상태로 해부학 책을 통해 인체 구조를 공부하고 근육을 뜯어봤다"며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정해진 시스템에 틈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감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그림 `무제` 앞에 선 김길후 작가. [사진 제공 = 학고재 갤러리]
세상의 인정을 받은 작업 관습을 과감하게 버리고 모험을 감행한 두 작가가 새로운 작품들을 들고 개인전을 열었다. 학고재 신관에서는 김 작가의 '혼돈의 밤'이 8월 22일까지 펼쳐지고, 학고재 본관에서는 최 작가의 개인전 'Unfold(펼치다)'가 8월 29일까지 개최된다.

김 작가 전시장에는 검은색 바탕에 색채들이 불길처럼 타오르며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작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를 지우고 그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 '물아일체(物我一體)' 경지를 보여준다.

순수한 아이 마음으로 돌아가 노동과 놀이가 일치된 상태라고 한다. 김 작가는 "예술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서 중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이번 전시작들이다"며 "그림에서 나 자신을 빼는 게 가장 중요하다. 특별한 대상을 그리기보다 구름처럼 형태가 없지만 보는 시선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그린다"고 말했다.

최 작가 전시장 입구에선 피부를 벗겨내고 근육과 골격만 남은 외팔 조각이 작업세계 변화를 알린다. 16세기부터 미술 해부학 교육에 사용해왔던 인체 근육·골격 모형 '에코르셰'를 활용하면서 기초로 돌아가 만든 작품이다.

근육과 뼈만 남은 작가 3명이 조각을 하는 작품도 그 연장선상이다. 뭔가를 제작하는 모습이지만 작업 대상물은 없어 상상의 여지를 만든다. 다만 빈 작업대 표면에 축적된 여러 겹 흙과 물감 흔적이 시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최 작가는 "작업 전환 방향을 고민하면서 조각가 태도를 들여다본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종이에 다양한 도형을 그려 전시장 곳곳에 세운 '언폴디드' 연작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서 있다.

오일을 먹여 종이가 두꺼워졌고, 평면이지만 앞뒷면에서 감상할 수 있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섬유질을 뭉쳐 만든 종이가 조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철학자와 대화를 통해 진행하고 있는 새로운 작업을 내년에 선보일 계획이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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