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재민박 할머니가 주신 말벌주.. "어, 생각보다 괜찮네"

글·사진 김채울 2021. 7. 30. 14:2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부천사의 백두대간 종주기 <2> 지리산 구간
어린이재활병원 기부하는 28세 여성 마라토너, 홀로 백두대간 670km 종주 도전
밤새 비를 맞아 손이 불었다
D+2 – Zero Day
전날 우여곡절 끝에 텐트를 설치한 뒤 쓰러지듯 잠들었지만, 비바람이 너무 심해 텐트가 날라갈까 걱정되어 여러 번 잠에서 깼다. 오죽 무서웠으면 인터넷에 강풍이 불면 사람이 자고 있는 텐트도 날라갈 수 있냐고 질문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걱정을 하다 겨우 잠들었지만 비바람이 너무 강해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결국 2시 반쯤부터 완전히 기상하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엄청난 비바람이었고, 어지간하면 겁을 안 먹는 내가 겁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벽이었고 어떻게 이동을 할 방법도, 철수를 할 방법도 없었다. 현재로썬 텐트 안이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을 버티며 어떻게 구례로 내려갈까를 고민했다. 우선 오늘은 기상특보가 발효되어 입산이 통제되었다는 걸 확인했다. 아, 종주 시작하자마자 기상특보 발효라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날씨가 안 좋긴 정말 안 좋아서 이 날씨에는 등산이 절대 불가능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삼재 휴게소에서 구례 시내로 가는 버스의 첫 차가 4시 10분이라고 하여 계속 버스가 오는지 확인하며 기다렸는데, 날이 안 좋아서 그런 건지 4시 10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새벽 5시, 누군가가 텐트 문을 두들긴다. 국립공원공단 직원 분이셨고, 언제 오셨냐고 물으시길래 어제 하산을 너무 늦게 한데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부득이 여기서 텐트를 치게 되었다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와 더불어 버스가 안 오던데 혹시 구례로 내려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지에 대해 여쭤보니 오늘 버스가 운행할지 잘 모르겠다고 답하신다. 그리고 고민하시더니 조금 있으면 교대 시간이니 퇴근할 때 읍내까지 태워 주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정말이지 그 말을 하시는 순간 직원 분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춰졌다. 아, 살았다..!
비가 들이쳐 다 젖어버린 텐트 내부
태워 주시기로 한 시간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 계속 텐트에 있다가, 6시 반쯤부터 비가 조금씩 수그러들길래 일단 철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배낭을 패킹했다. 텐트는 1년 넘게 쓰고 있는 텐트인데, 어느 순간부터 비 올 때마다 물이 새기 시작했는데 어제는 비바람이 유독 심해서 그런 건지 텐트 안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침낭은 물론이거니와 입은 옷과 배낭까지 다 젖어버렸고, 너무 추워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힘겹게 철수를 끝내고 난 뒤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직원 분께서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시며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 쫄딱 젖은 나를 보시곤 수건도 주시고, 따뜻한 차도 주시며 몸을 녹일 수 있게 도와주셨다. 밤새 젖어 있었더니 손은 쭈글쭈글한 손이 되어버렸고, 추위가 안 가셔 계속 몸이 떨렸는데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실내에 있다 보니 이내 조금씩 괜찮아졌다.
따뜻한 사무실에서 몸을 녹이며 기다리다 9시가 되어 직원 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구례 읍내까지 내려올 수 있었고, 읍내에 있는 모텔에 체크인을 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젖은 장비들을 말리기 위해 다 펼쳐놓고, 아침을 먹기 위해 라면을 꺼낸다. 아침을 먹으려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어제 오전 10시 장터목대피소에서 전투식량을 하나 먹은 것 말고는 뭘 챙겨먹은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 잘 걷다가 후반에 왜 갑자기 체력이 방전되었나 스스로에게 의문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거리와 시간 계산을 잘못 한 것도 있지만, 보급을 제대로 안 해줘서 그랬던 것 같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첫 날부터 제대로 준비하지 못 한 것에 대해 혼난 듯한 기분이다. 명성대로 쉽지 않은 대간 길이었고, 또 조금 더 철저히 준비하지 못 한 스스로에게 반성을 많이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백두대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누적 거리 34km, 잔여 거리 약 650km. 잘 할 수 있을까?
만복대에서 만난 등산객분이 주신 떡
D+3 성삼재~여원재
전날 구례 읍내까지 태워 주셨던 공단 직원 분께서 출근길에 픽업해주신 덕분에 아주 편하게 다시 성삼재까지 올라왔다. 종주 시작부터 만나는 따스한 손길에 감사함을 느끼며 기분 좋게 길을 이어간다.
성삼재에서 복령치까지는 딱 한 명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폭의 길이 쭉 이어져 있는데, 길이 잘 정비되어 있는데다가 양쪽으로 풀이 우거져 있어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라 절로 휘파람이 불어진다. 길도 좋을 뿐더러 어제 의도치 않게 제로데이를 가지며 하루를 푹 쉬어준 덕분인지, 컨디션도 좋아서 큰 어려움 없이 쭉쭉 걸어나갔다. 작은고리봉와 묘봉치를 지나 만복대에 도착했다. 점심도 먹을 겸 배낭을 내려놓고 쉬는데, 만복대에서 만난 등산객 한 분이 떡을 주신다. 떡을 먹겠냐는 어르신의 물음에 “주시면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왜인지 주변의 다른 등산객분들도 주섬주섬 배낭에서 먹거리를 하나씩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주신다. 음식 무게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탓에 백두대간 종주 중에는 계속 배고픈 상태일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노치마을에서 쉬는 중
만복대에서 30분정도 점심을 먹고 휴식을 가진 뒤 정령치를 향해 계속 길을 이어간다. 만복대에서부터는 내리막 위주의 길이었는데, 역시나 큰 어려움이 있는 길은 아니라 무난하게 걸을 수 있었다. 다만 더울 뿐이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면 7월엔 도대체 얼마나 더울까? 첫날부터 호되게 당했더니 이제는 머릿속에 앞으로의 길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이 한가득이다. 그래도 오늘은 가는 길에 휴게소가 있다. 정령치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콜라 한 병을 사서 한 번에 들이켰더니 모든 더위와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매일 하늘에서 콜라가 하나씩만 떨어져준다면 1년 내내 백두대간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콜라는 정말이지 만병통치약이다.
여원재로 향하던 중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조망터
콜라로 에너지를 충전한 뒤 고리봉을 지나 고기삼거리로 향한다. 고리봉까지는 무난했지만 고리봉에서 고기삼거리까지의 길이 꽤 힘들었다. 쭉 내리막길이었는데, 경사도 은근히 심하고 낙엽이 많은데다가 어제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땅이 너무 질퍽거려 계속 넘어지기 일쑤였다. 무릎도 발목도 안 좋은 탓에 넘어지면 부상으로 이어질 것 같아 집중하며 천천히 내려왔다. 혼자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부상이 생기면 대처가 어려워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걷고 있다. 고기삼거리까지의 길은 초반에는 어려웠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완만한 흙 길이 이어져 트레일러닝을 하며 뛰어내려왔다. 삼거리 이후 노치마을까지는 약 1.5km의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했는데 태양이 어찌나 강하던지, 아스팔트 위에서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추위에 약하고 더위에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추위에도 약하고 더위에도 약한 사람인 듯 하다. 노치마을은 유일하게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에 있는 ‘노치샘’에서 취수가 가능하다고 해서 구경할 겸 노치샘에 잠시 들렀는데, 샘에는 올챙이 수십 마리가 살고 있어 차마 취수를 하지 못 했다. 올챙이라니, 올챙이라니! 오늘이 백두대간 30일차정도 되었으면 이 물도 마실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적어도 3일차인 오늘의 나는 아직 그러지 못 하겠다.
올챙이가 헤엄치는 노치샘
노치샘을 지나 길 따라 오르다 보면 산소 뒤로 다시 본격적인 탐방로가 이어진다. 수정봉까지의 길은 전반적으로 길이 좋은 편이었고, 대부분 흙 길이라 나에게는 최고의 길이었다. 무릎수술을 한 이후로 장거리를 다니면 항상 무릎에 무리가 오는데, 흙 길은 비교적 부담이 적어 좋다. 수정봉 이후로는 내리막 이후 다시 작은 봉우리 두 개를 다시 올라야 했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여기서 잘지, 아니면 여원재까지 내려가서 야영을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맘 편히 야영하려면 산에서 자는게 더 좋은데, 내일 아침에 식수 구하는게 힘들 것 같아 고민하다 여원재에서 유명한 ‘여원재민박’에 전화 드려보니 민박 마당에 텐트 치는 게 만 원 뿐이 안 한다 하셔서 샤워도 할 겸 편하게 쉴 생각에 하산을 결정했다. 고민을 꽤 오래 하다 내려온 탓에 시간을 많이 까먹어서 6시 반이 되어야 민박집에 도착했다. 일반적인 종주자들과 다르게 나는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고 백두대간을 걷고 있다. 하루이틀치의 루트 정도만 확인하고, 당장 오늘 어디까지 갈지 어디서 잘지를 정하지 않고 걷고 있다 보니 비효율적인 여행을 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즉흥적이고 꽤나 재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다.
여원재민박 마당에 설치한 텐트
민박집 마당에 텐트 피칭을 끝낸 뒤 바로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민박집 주인할머니께서 샤워는 나중에 하고 맥주부터 마시라고 하신다. 주문 드렸던 맥주 뿐만 아니라 김밥과 총각김치까지 함께 내주시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한 손엔 맥주를, 또 다른 한 손엔 총각김치를 들고 먹으며 시골 풍경을 바라보는데 오늘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게 행복이지”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샤워를 끝내고 어느정도 장비 정리도 끝낸 뒤 김밥을 먹었지만 뭔가 아직은 허기진 느낌이라 라면을 끓여 먹을까 싶었다. 할머니께서 아까 김밥도 주시고 해서, 할머니 식사 안 하셨으면 할머니 라면도 같이 끓일 생각에 라면을 끓이기 전에 여쭤봤다.
여원재민박 할머니와 저녁
“할머니, 저 라면 먹을 건데 같이 드시겠어요?”
“뭔 라면이고! 우리 집에도 라면 많다. 라면같은 소리하지 말고 퍼뜩 기어들어온나!”
할머니의 호탕하신 부름에 나는 쭈뼛쭈뼛 댁 안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갑자기 할머니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구워 주시는 삼겹살김치구이, 그리고 직접 재배하신 쌈까지! 김치가 일품이었다. 칡주도 주셔서 처음 먹어봤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요 며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저녁을 먹다 1시간정도 지나지 졸음이 슬금슬금 몰려왔는데, 할머니께서 계속 새로운 술을 가져오신다. 칡주, 오미자주에 이어 말벌주까지. 말벌주라니.
말벌주는 보는 것조차도 너무 무섭게 생겨서 전 안 먹겠다고 손사래 쳤는데, 한 번만 먹어보라고 하시는 말씀에 눈 딱 감고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있다. 나도 워낙 술을 좋아해서 술자리는 언제나 즐겁지만, 그럼에도 할머니께서 계속 술을 주셔서 “할머니, 저 더 먹으면 내일 산행 못 할 것 같은데요”하니, “그건 네가 알아서 혀” 하신다. 털털하고 호탕하신 할머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백두대간을 하며 여원재민박을 들르지 않으면 백두대간을 걸은 게 아니라고 하던데, 그 말에 백 번 공감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을 걷기 위해 왔지만 종주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단 백두대간을 통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나섰는데, 3일차인 오늘, 벌써부터 여행이 즐겁고 행복하다. 백두대간 종주를 끝내고 할머니를 뵈러 이 곳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그 때는 다음 날에 대한 걱정도 없으니 할머니와 밤새도록 술을 마셔야겠다.
여원재민박 출발 전 할머니와
D+4 여원재~복성이재
전날 잠이 들던 시각엔 비가 안 와 오늘은 비가 안 오니 다행이다 싶었는데, 내 마음을 몰라주는 무심한 하늘은 결국 새벽에 꽤나 강렬한 비를 쏟아 붓는다. 빗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새벽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또 첫 날처럼 흥건히 젖은 바닥,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젖어있는 침낭과 배낭이 날 맞이해준다. 아.. 진짜 텐트. 앞으로도 비가 자주 온다는데 이거로 어떻게 버티나, 싶은 생각에 아침부터 한숨이 푹푹 나왔다. 침낭이 조금이라도 마르길 바라며 마당에 펼쳐 둔 뒤, 아침으로 먹을 라면을 끓이는데, 할머니께서 라면을 김치 없이 먹으면 쓰냐고 하시며 총각김치 그리고 공기밥까지 하나 내어 주신다. 어제 저녁에 이어 아침에도 여전히 인심이 가득하시다. 만약 이 곳에서 묵지 않았다면 백두대간에서의 정말 즐거운 추억을 놓칠 뻔 했다. 우연이 인연이 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우연 속에서 만난 인연인 박초월 할머니께 이 글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거미줄을 피하기 위해 스틱으로 헤쳐가며 걸었다
민박집을 벗어나 오늘도 오늘의 길을 떠나본다. 오늘은 여원재에서 복성이재까지, 약 19km의 구간이다. 사실 2일차까지만 루트를 생각해두고 그 이후는 어디까지 갈지 안 정해둔 상태였는데, 할머니께서 보통 많이들 여원재에서는 복성이재까지 간다 하셔서 나도 오늘은 거기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원재에서 방아치를 지나 고남산 정상을 향하는데, 고남산은 전체적으로 큰 조망도 없고 길도 무난한 동네 뒷산과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길이 좁고 수풀을 헤쳐 지나가야 하는 길이 많았는데, 거미줄이.. 거미줄이 진짜 많다. 정말 너무 많다. 정말이지 오늘만 족히 얼굴에 덮인 거미줄을 100번은 더 뜯어냈을 것이다. 얼굴에 들러붙는 거미줄을 피하려고 뒤로 걸어보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보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하다가 결국 오늘은 하루 종일 스틱을 거미줄을 걷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수풀로 가득한 계단
왜인지 오늘은 시작부터 몸에 힘도 없고 다리도 잘 안 움직여 힘들어하며 올랐다. 물을 많이 챙겨 배낭이 무거워져 그런 건지, 빗소리에 잠을 설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술을 먹어서 그런 건지. 이제 백두대간을 막 시작한거지만 컨디션이 너무 들쭉날쭉 인 듯 하다. 보통 여원재에서 고남산까지는 2시간정도면 오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3시간 반이나 걸려 겨우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내려놓고 30분간 쉬며 과자와 물을 먹으며 쉬는데, 마음 같아선 그냥 오늘은 여기에 텐트 치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왜 이렇게 힘든 것인가.
몽환적인 분위기가 좋았던 아막산성
정상에서의 달콤했던 휴식을 끝내고 매요마을로 향한다. 매요마을은 이름도 귀여운데 마을도 알록달록하니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마을이다. 언젠가 이런 동네로 내려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매요마을에는 ‘매요휴게실’이라는 매점이 있는데, 이 곳은 대간꾼들이 다 한 번씩 들리는 유명한 장소인 듯, 수 년, 아니 수 십 년간 지나쳐가신 수많은 분들의 산악회 리본이 걸려있다. 고남산에서부터 이미 지쳐있던 몸을 이끌고 매요마을을 지나 사치재로 향해가다가 문득 점심을 안 먹었다는 게 떠올라, 2시 30분이 넘어서야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전투식량을 하나 꺼내 먹었다. 지리산 구간을 지날 때에도 에너지 보충을 제대로 안 해줘 퍼졌기에 이제 잘 챙겨 먹어야지 싶었는데, 계속 걷기만 하다 보니 생각보다 허기가 잘 안 느껴지는 듯 하다. 여기서 또 한 번 길게 휴식을 한 뒤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 사치재 가는 길에는 너덜 지대가 하나 있는데, 분위기도 음침하고 모기도 많은데다가 바위에는 이끼가 잔뜩 껴있었다. 아직은 산을 많이 다녀보지 못 했기에 처음 경험해보는 야생적인 산길이었고, 새로운 느낌이 들어 재미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치재를 지나고 나서부터가 야생길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와, 이게 길이라고?” 똑같은 혼잣말을 계속 되풀이하며 걸었다. 내 키만한 수풀이 우거져 있고, 길은 딱 한 명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폭에, 거미줄은 끊임없이 길을 가로막는다. 산악회 리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이 곳에서 조난(?)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미로게임처럼 빼곡한 수풀 사이를 헤치고 다니다보니 마치 내가 베어 그릴스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는데, 처음 마주하는 이런 야생적인 산은 유독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너무 더워서 땀이 흐르다 못해 쏟아져 내렸고, 더운 데다가 습하기까지 해 힘이 다 빠져버렸다. 겨우 헬기장에 도착한 뒤 그냥 오늘은 여기서 잘까 한참을 고민했는데, 그러면 내일이 너무 힘들어지니 조금만 더 참고 가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조망이 크게 없고 예쁜 곳을 못 마주쳐서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아막산성에 도착하니 아쉬운 마음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끼가 잔뜩 낀 커다란 돌무더기, 나무들로 인해 빛이 가려져 어두운 하늘로 음침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기도 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분위기와 감성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운행을 끝내고 복성이재에서 지인 차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원래는 복성이재에서 조금 더 올라 봉화산 정상 부근에 있는 정자에서 잘 생각이었다. 아, 근데 너무 힘들다. 가벼운 마음으로 배낭을 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대간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이다. 백두대간을 걷는다고 글을 올렸을 때 복성이재 근처에 살고 있는 지인이 근처 지나갈 때 연락하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오늘은 지인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연락을 했더니 바로 복성이재로 나를 데리러 와주었고, 그렇게 매번 놀러가겠다고만 하고 못 가봤던 영이네정원을 드디어 방문할 수 있었다. 지인은 영록오빠와 하영씨인데, 영록오빠는 2018년 아타카마사막마라톤대회를 함께 출전했고, 하영씨는 영록오빠의 여자친구로 작년부터 장수로 내려와 귀농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멋진 커플이다. 영이네정원은 하영씨네 가족이 작년에 직접 지은 집으로, 민박집도 운영하고 흑염소도 키우신다. 벌써 내가 이 집을 찾은 지인 중 두번째 백두대간 일시종주자라고 하는데, 나중에 백두대간 민박으로 운영해도 굉장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방에 짐을 풀고 개운하게 씻고 나왔는데, 하영씨가 만찬이 차려진 밥상을 내어준다. 대간길에 이런 진수성찬이라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든든한 저녁을 먹고, 행복한 밤을 보낸다.

<다음에 계속>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