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의 그림]점잖은 외관에 파격적 미디어아트 품은 SK서린빌딩
백남준 'TV첼로'와 박현기 '현현'
기술의 시대 인간,자연,철학 공존 추구
항상 말쑥한 정장 차림의, 평범한 회사원인 그가 상상도 못할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었음을. 알고 지낸 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고나 할까. 그저 그런 시시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이토록 과감할 줄은 몰랐다는 그런 기분. 서울 종로구 ‘SK(034730)서린빌딩’의 1층 로비에서 백남준(1932~2006)의 ‘TV첼로’와 박현기(1942~2000)의 ‘현현(顯現)’을 마주했을 때의 참신한 충격이 꼭 그렇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과 1호선 종각역 사이, 광화문우체국 인근에 자리 잡은 SK서린빌딩은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충만하던 지난 1999년 10월 준공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SK그룹은 1988년 이후로 을지로2가의 옛 중소기업은행 본점 자리에 SK상사의 회장실을 두고 있었으나, 신축과 함께 본사 이전이 진행됐다. 지상 36층, 지하 7층의 이 건물은 곡선 하나 없이 반듯한 직선으로만 이뤄졌다. 비례감은 탁월하다. 밀레니엄의 들뜬 분위기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 꼿꼿하기만 한 이 건축물을 두고 건축평론가 고(故) 구본준 기자는 ‘검은색 정장의 신사’라고 했다. 원로 건축가 김종성(86)의 작품이니 그럴 만하다. 김종성은 20세기 건축계를 대표하는 거장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의 건축 철학을 승계한 유일한 한국인 제자였다. 전통적인 고전주의 미학을 고수하면서도 근대 산업사회가 발견해 낸 소재를 절묘하게 얹어 쓴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산업혁명 이후의 합리성과 평등주의를 효율적으로 건축물에 투영한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 작가다. 그런 스승을 찾아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종성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대표작이자 현대 오피스 빌딩의 전범(典範)이라 불리는 뉴욕시 맨하탄의 ‘시그램(seagram) 빌딩’의 영향이 SK서린빌딩에도 스며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기능과 본질에 충실하면서 튀지 않고도 오래도록 세련미를 유지하는 명품 미학의 이 건물은, 묵묵히 제 할 일 잘 하는 사람 특유의 신뢰감을 준다.
종로 쪽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밖에서부터 번뜩이는 기운이 느껴진다. 심상치 않다. 입구 바로 오른편에 놓인, 백남준의 ‘TV 첼로’가 내뿜는 영상들의 반짝임이다. 모니터 2개를 두 줄로 쌓고, 그 위에 모니터를 90도로 돌려 세로로 얹고 다시 가로로 얹는 식으로 4개 층을 쌓아 첼로의 형상을 갖췄다. 4개의 줄(絃)도 걸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해 피아니스트와 작곡가의 꿈을 안고 독일 유학길에 오른 백남준은 현대 음악의 확장된 형태로 전자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1959년 독일 뮌헨의 갤러리22에서 데뷔 공연처럼 선보인 것이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로 유명한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였다. 존 케이지는 무대 위 피아노에 앉아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채 주변의 적막과 관객들의 웅성거림을 음악 작품으로 칭한 ‘4분 33초’를 작곡한 현대음악가다. 케이지가 소음까지도 음악으로 끌어들였다면, 백남준은 행위 자체를 음악적 소재로 사용한 ‘총체예술’을 시도했고 그 행위예술을 로봇, 영상 매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시켰다.
‘TV첼로’는 백남준의 뮤즈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맨(1933~1991)과의 협업에서 탄생했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의 주요 멤버로 독일 등지에서 공연할 때도 무어맨의 첼로 연주에 맞춰 백남준의 로봇이 ‘로봇 오페라’를 공연했다. 무어맨은 웃옷을 벗은 백남준을 끌어안고 첼로처럼 연주하기도 했으며, 1967년 뉴욕 공연 때는 누드 퍼포먼스를 진행하다 외설죄와 음란죄 혐의로 두 사람 모두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무어맨에게서 영감 받아 탄생한 ‘TV첼로’는 그녀의 첼로 연주 장면은 물론 동료 예술가들의 공연 장면을 영상으로 담아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됐다. ‘TV첼로’는 지난 2019년 10월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해 지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에서 한창 진행 중인 백남준 회고전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백남준의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 ‘TV브라’부터 ‘TV부처’까지 성속을 넘나들던 백남준은 요즘 나오는 ‘구글안경’보다 훨씬 앞선 1971년에 ‘TV안경’을 제작하기도 했다.
SK서린빌딩 로비의 작품은 1999년작으로, 흘려 쓴 백남준의 서명이 네온사인으로 제작돼 붙어 있다. 모니터를 감싼 투명 아크릴 겉면에는 특유의 아이같은 붓질로 TV상자를 닮은 얼굴 모양과 함께 공룡·물고기·해파리가 등장해 선사시대 암각화를 떠올리게 한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되 문명 발달 이전의 근원을 늘 탐구하던 백남준의 철학을 담은 작품이다. 영상에는 누드의 서양 여성이 달걀처럼 둥글게 몸을 웅크려 태초의 생명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장면을 비롯해 악기 연주와 관련한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백남준은 TV첼로에 대해 “내가 만든 많은 작품들 중 다양한 경험들을 집적시킨 작품”이라며 “샬롯 무어맨 외에 지금까지 같이 활동했던 많은 친구들과 함께 담았던 비디오 영상들을 현대 생활의 필수품인 오브제(TV)로 꼴라주했으며, 작품 전체에서 보이는 그녀의 첼로 이미지를 통해 각자 상상력의 지적 도움을 얻어 각각의 모니터에서 발산되는 영상 이미지들을 유희적으로 조합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회전문 건너편의 널찍한 공간에는 박현기의 1999년작 ‘현현’이 설치돼 있다. 뭐가 작품이냐고 두리번거릴 수도 있는데, 폭 1.3m에 길이 4m의 대형 대리석이 40㎝ 높이의 평상처럼 설치된 탁자 형태와, 공간 구석에 장승처럼 선 어른 키 만한 1.8m 자연석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백남준이 글로벌 유목민이라면 박현기는 토종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미디어아트를 개척한 인물이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간 할아버지의 손자로 오사카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현기는 홍익대 서양화과에 진학했다가 밥벌이가 시원찮을 것을 염려해 건축학과로 전과, 졸업했다. 고향 대구에서 인테리어 겸 건축사무소 ‘큐빅’을 운영하던 그는 이강소·최병소 등이 주축이던 ‘대구현대미술제’를 비롯한 현대미술운동에 관심을 갖게 돼 1970년대부터 한국 1세대 미디어아티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박현기는 대구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 백남준의 1973년작 ‘지구의 축(Global Groove)’을 영상으로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을 예술 동력 삼아 1977년 대구현대미술제에 참여한 작가는 실제 존재하는 나무와 관념에만 있는 가상의 그림자를 표현한 작업을 선보였고, 이듬해 그의 대표작이 된 일명 ‘비디오 돌탑’ 연작을 처음 발표했다. 작가는 어릴 적 경험한 피난 행렬에서 앞서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며 ‘돌 주워라’ 말하고 그렇게 주운 돌로 고개마루에 기원의 돌탑을 쌓던 일을 뇌리에 새겼다. 전쟁 중임에도 바닥에 나뒹구는 돌 하나에 각자의 소망을 의탁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돌탑’ 작업의 단초가 됐다.
백남준이 현란한 영상을 통해 ‘인식’의 문제를 묻는다면 박현기의 영상은 동양의 정신성과 그 에너지를 구현하는 데 몰입했다. 널찍한 사각의 돌판에 다가서면 연못이 보인다. 엄밀히는 천장에 설치된 LCD플레이어가 투사한 연못의 영상이다. 물과 돌이 있고, 그 뒤 통유리 바깥으로는 도심 속 작은 숲이 마치 계곡처럼 펼쳐지니 현대 예술이 그려낸 한 폭의 산수화라 해도 되겠다. 작가는 돌판에 비친 연못을 음(陰)으로, 홀로 선 괴석을 양(陽)으로 상징해 음양오행의 이치를 투영했다. 그리고 연못에 비치는 돌 그림자를 “음이 그리는 양의 환영”으로 담아냈다.
이들 로비의 작품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세기가 바뀌는 시기의 고민과 기대를 응축해 선정됐다. 공교롭게도 작가 둘 다 작품 설치를 현장에서 보지 못했다. 뉴욕에 있던 백남준은 뇌졸중에서 깨어난 후 구겐하임회고전을 준비하느라 방한할 수 없었고, 박현기는 말기암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작가의 중요한 시기 작품이 모였다는 점 또한 이곳 로비가 빛나는 이유다.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던 그날 새벽, 최태원 회장은 이곳 SK서린빌딩에 마련한 종합상황실에서 뜬눈으로 새해를 맞았다. 통신회사를 포함한 SK인지라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컴퓨터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밀레니엄 버그 ‘Y2K’를 예의주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술의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인간과 기계, 자연과 첨단의 공존을 고려해야 하는 기업 정신은 그 때나 지금이나 로비에 놓여 있는 거장의 작품들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글·사진=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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