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주의자' 양산하는 사회..올림픽에 정점 찍나 [정지혜의 빨간약]
“양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한국 국가대표 선수 안산이 남성 네티즌들로부터 짧은 머리와 관련해 비난을 받고 있다. 이는 아직도 머리스타일이 논쟁거리가 되는 나라에서 나타나는 온라인 반페미니즘의 한 단면이다.” (켈리 조, 뉴욕타임스 기자)
5년 만에 열린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이 한국에서는 하나의 특이점이 될 조짐이다. 이미 BBC와 로이터, AP통신 등 주요 외신이 해외 토픽감으로 주목하며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봐야 한다. 차별주의자들이 공론장을 망가뜨리는 것을 방치해 온 대가로 국제 망신을 피하기 힘들어진 한국 사회는 이제 기로에 놓였다. 지금이라도 수치심 모르는 사회를 바로잡을 것인가 아니면 혐오와 차별 정서를 양산해 온 굴레에 다시 갇힐 것인가.
◆기이한 ‘숏컷 논란’의 본질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올림픽 금메달 2관왕을 한 선수에게 쏟아진 집중포화는 낯 뜨거울 지경이다.
숏컷을 했고, 여대를 나왔고,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았고, ‘오조오억’, ‘웅앵웅’ 등의 (일부 네티즌들이 남혐 용어라고 주장하는) 용어를 썼으므로 페미니스트로 의심되는데, 본인으로부터 이에 대한 사과나 해명을 들어야겠다는 게 남초 커뮤니티발 숏컷 논란의 골자다. 이 대목에서 외신 기자들은 오히려 “페미니스트라는 걸 왜 사과해야 하느냐. 페미니스트가 왜 욕이냐”고 한국의 취재원들에게 반문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직 개인전이 남은 선수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욕설과 조롱을 남기고, 한국양궁협회에 전화 또는 게시글로 “페미니스트인지 해명하라” “페미이면 사과하고 국대·메달 박탈하라”고 요구했다. 여론이 악화하자 “페미 아니라고 하면 다 끝난다”는 적반하장식 태도도 보였다. 페미니즘 사상검증에 대한 본색을 드러낸 셈이다. 미디어에 노출된 여성이 페미니즘과 선을 긋기를 바라는 것, 뛰어난 업적의 여성조차 검열하고 굴복시키는 힘으로 여성 집단에 대한 통제감을 강화하고 싶은 심리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뛰어난 성취와 보상을 거머쥐게 된 청년 여성에게 느끼는 박탈감이 원천이라고 본다. 최근 대두된 남성 피해자론, 역차별 정서와 맥이 닿는다는 분석이다. 문제로 제기된 것들은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선수의 SNS를 뒤진 끝에 모은 정황이라는 분석으로, 원인과 결과의 선후관계를 조금 다르게 보는 시각이다.
본질이 무엇이든 이러한 악의적 괴롭힘을 단순히 일부의 일탈로 치부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 출전 중인 선수에게 직접 사이버 테러를 가하는 것, 그가 소속된 단체에 집단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행위를 방구석 여포의 키보드 워리어 짓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껏 이런 행태를 묵인하거나 동조하며 차별주의자가 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준 기득권의 무책임함 때문에도 더 이상 묵과하기 어렵다. ‘오조오억’, ‘웅앵웅’ 등을 문제 삼았던 비슷한 이전 사례에서 다수의 기업이나 기관이 ‘뭣이 중한지 모른 채’ 공식 사과와 과잉 대응을 남발했다. 공론장에는 고민과 문제 의식 없이 ‘남혐과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는 내용의 기사가 쏟아졌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거리낌 없이 일탈적 행동이 가능한 것은 사회가 그래도 된다는 메시지를 줘 왔기 때문임을 성찰할 때다. 타깃만 바꿔 여성 대상 온라인 괴롭힘을 지속하고 스케일을 키우기까지 한 건 그런 배경에서 가능했던 합작품에 가깝다. 일부 악성 인터넷 유저를 꼬리 자르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기 힘든 이유다. 공론장에서 마이크를 주지 말아야 할 차별과 혐오의 메시지를 주류 사회가 통제하지 않고 들어준 결과 행동반경이 여기까지 왔다. 안이하게 방관해 온 기성세대, ‘젠더 갈등’이나 ‘갑론을박’ 같은 말로 혐오자에게도 대등한 발언권을 쥐여 온 언론의 책임이 크다. 칼럼니스트 곽정은씨의 말처럼 “논쟁(argument)과 괴롭힘(bullying)은 구분해야” 한다.
◆미션, 보상 등 ‘게임화’ 된 여혐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여성들에 대한 공격이 마치 게임하듯 진행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자꾸만 성 대결 양상이 조장되는 것은 승패가 갈려야 하는 게임의 특성 때문이다. 게임은 비장하지 않다. 중독적이고 화력을 모으기도 쉽다. 이들 중에는 진지하게 이런 논란을 믿는 쪽도 있고, 억지란 것을 알고 있지만 무슨 상관이냐는 쪽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특정 여성을 낙인 찍고, 페미니스트를 척결한다는 같은 목적 아래 대동단결한다.
이 과정은 게임 속에서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하듯 진행된다. 이번 안산 선수의 경우처럼 한 여성을 타깃 삼아 ‘페미로 의심되는 정황’을 모으고, 개인과 소속 기관 등을 압박한 뒤, 끝내 사과와 해명을 받아내려 하는 식이다. 지난 ‘집게손 남혐’ 논란 때와 유사한 패턴이다.
이때 GS25, 경찰청 등 기업과 정부 기관 할 것 없이 남초 커뮤니티의 문제 제기에 공식 사과를 함으로써 효능감을 안겨준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과가 경솔한 결정이었음은 GS25의 사례를 통해 드러났다. 사과는 물론 관계자를 해고하는 등 적극 대응했음에도 GS25에 대한 남혐 논란 문제제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정말 GS25가 우리나라 기업 중 가장 남성을 혐오하는 기업이라서일까. 그보다는 클레임을 걸었더니 사과 또는 담당자 해고라는 보상이 즉각 주어지는 과정이 흥미를 유발했다고 보는 편이 개연성이 있다.
실제로 비슷한 문제제기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기업들은 이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보상이 될 만한 어떤 종류의 반응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임화(gamification)된 매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기성세대가 사태를 어긋난 핀트와 무게감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주도하는 일부 청년들에게 놀아났다고 볼 수도 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이유
가장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놀이화된 혐오가 실제 현실에서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점이다.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의 문제도 간과해선 안된다.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메타버스의 시대에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남자가 저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거나 ‘그냥 찌질한 인터넷 유저의 일탈이니 무시하라’는 말 모두 무의미한 이유다. 자신은 피해자가 될 확률이 낮으니 할 수 있는 한가한 말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안산 선수에 대한 숏컷 논란에 곧장 ‘숏컷·페미니스트 인증’ 물결로 응원과 연대를 표시한 여성들은 어떨까. 신체심리학자 한지영씨가 제안한 해시태그 #여성_숏컷_캠페인 운동에는 곧장 6000개 넘는 인증이 이어졌고, 배우 구혜선, 김경란 전 아나운서 등 연예인들도 동참했다. 이들은 이번 논란이 특정 여성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님을 그 동안의 학습을 통해 알고 있다. 언제든 나를 향할 수도 있는 화살임을 안다. 무시해서 될 일이 아니란 자각을 했고, 기계적 중립 수준에 머물러 온 인식이 이 같은 결과를 낳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목소리를 내고, 필요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생계와 커리어가 걸려있는 현실의 존엄한 무게를 게임처럼 가볍게 다룰 수는 없다. 함부로 난입한 일부의 의견이 여론으로 과대 대표되고, 분명한 피해를 발생시키는데도 아무 일 없는 척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직장에서, 올림픽 무대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 온 여성들의 노력을 터무니없는 단어 몇 개로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에는 유구한 성차별, 여성 멸시 사회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마저 서슴없이 가해지는 사이버 테러를 계기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발언과 행동을 결심한 여성은 더욱 늘어난듯 보인다. 이것도 올림픽의 힘이라면 힘이다. 패색이 짙거나 경기 내내 쉽지 않은 플레이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혼을 발휘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주는 메시지가 있다. 특히 전 세계에서 모인 국가대표 여자 선수들이 보여주는 스포츠 정신은 무력감에 지쳐가던 경기장 밖의 여성들에게도 묘한 자극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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