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조선시대 남편들은 '살림男'.. 퇴계는 '주부9단'이었다

나윤석 기자 2021. 7. 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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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풍속화로 길쌈을 하는 아내 옆에서 새끼를 꼬는 남편을 묘사하고 있다. 돌베개 제공

■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 정창권 지음 │ 돌베개

일기·편지·문집 등 토대로

‘조선 = 가부장제’통념 반박

“남편이 자녀·손주교육 열성

집안일 소홀땐 아내가 구박

연암, 고추장 반찬 만들기도

일제치하때부터 역할 구분”

“조선 시대 남자는 농사·부업 등 ‘바깥 살림’뿐 아니라 의식주를 책임지는 ‘안살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살림’에 남녀 경계는 애초부터 없었다.”

정창권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는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에서 이런 색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남녀 역할·지위를 엄격히 구분하는 ‘가부장제’의 기원이 조선이라는 통념을 반박하며 가정 내 성(性) 역할이 고정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라고 지적한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과 ‘양반전’ 등에 나오는 글만 읽고 집안일엔 무심한 남성은 결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남은 자료의 한계 탓에 주로 양반가의 인물들을 다루지만, 저자는 ‘생활의 기록’인 일기와 편지, 개인 문집 등을 토대로 조상들이 영위한 ‘남녀공존의 역사’를 복원한다.

조부모·부모·형제자매부터 유모·노비까지 많게는 150명 안팎이 모여 산 양반가는 요즘으로 치면 웬만한 중소기업과 맞먹는 규모였다. 신발·옷·쌀·술 등 생활필수품 생산은 물론 자녀 교육, 종교 활동도 모두 가정에서 이뤄졌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암시하듯 당시엔 다른 무엇보다 ‘집안’을 먼저 생각했고, 해야 할 일도 많았기에 남녀가 ‘동업’하지 않으면 가정을 꾸리기 힘들었다. ‘사적 공간’인 현대 가정과 달리 조선 시대 가정은 ‘사적 공간’인 동시에 ‘공적 공간’이었던 셈이다. 음식 장만이나 옷 짓기 같은 안살림은 주로 여자가, 재산 증식과 노비 관리 등 바깥 살림은 남자가 담당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뀌었다. 실제로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퇴계 이황은 지적장애를 가진 아내를 대신해 안살림과 바깥 살림을 도맡았다. 저자는 “선비란 그에 걸맞은 풍모를 지키면서 생업, 즉 살림에도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 퇴계는 ‘살림의 달인’이었다”고 평가한다.

책은 ‘처가살이’가 보편적 풍속이고, 아들딸에게 재산을 차별 없이 나눠주는 ‘균분 상속’이 일반적이었던 조선 중기까지 남자들이 어떻게 살림에 기여했는지 유형별로 보여준다. 먼저 요리. 연암은 고추장이나 볶은고추장 같은 반찬거리를 만들어 자식에게 보내줬고, 조선 중기 지식인 오희문은 된장과 식혜를 직접 담갔다. ‘요리하는 남자’는 왕가에도 흔했다. 영화·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궁중 요리사는 대개 궁녀였을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남자 요리사를 일컫는 ‘숙수(熟手)’라는 직책이 따로 있었다. 또 영조처럼 왕위에 오르기 전 몸이 아픈 부왕(숙종)을 위해 음식을 받들고 탕약을 올린 왕세자도 있었다. 당시 남성들은 자식과 손주 교육에도 열성적이었다. 1800년 전후 퇴계 후손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사부 일과’(선비 일과표)를 보면 시간대별로 글씨 지도, 독서 단속 등의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을 쓴 학자 이문건은 “손자가 성품이 미련해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며 공부는 하지 않는다. 화가 나서 손으로 벽지를 찢어버렸다”고 답답해했다. ‘치맛바람’이 아닌 ‘두루마기 바람’으로 극성스럽게 후손들을 가르친 셈이다. 이와 함께 책은 남성들이 임신한 아내를 위한 보조, 정원 가꾸기, 제사를 올리고 손님을 접대하는 ‘봉제사 접빈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집안일을 수행했다고 설명한다.

‘남성의 살림 참여’가 당연했기 때문에 집안일에 소홀할 경우, 자연스럽게 부부 갈등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첩 문제’보다 ‘살림 소홀’이 부부 싸움의 더 큰 원인이었다. 오희문은 ‘쇄미록’에 “아침에 아내가 나보고 가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 한참 입씨름을 벌였다. 아! 한탄스럽다”고 적었다. 살림을 등한시하면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문집 ‘성소부부고’에서 선배 학자인 미암 유희춘을 향해 “학문에만 독실하고 가사를 다루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저자는 “조선 시대 남자의 모든 바깥 활동은 여자의 안살림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며 “어쩌면 조선은 오늘과는 정반대의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조선 후기 들어 남녀 분별을 강조하는 성리학이 정착되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축소하는 ‘내외법(內外法)’이 강화되며 “남자가 살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생겼으나 이때도 많은 남성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을 뿐 여전히 집안일에 깊이 관여했다.

책은 일제강점기 이후 ‘남성은 사회활동, 여성은 집안일’이라는 역할 구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일제는 식민지 여성에 대한 교육 목표를 “부덕(婦德)의 함양을 통한 ‘현모양처’ 양성”으로 삼았는데, 현모양처는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식된 ‘왜곡된 여성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 시대에 ‘양처’는 ‘양민의 처’를 뜻하는 신분적 개념이었는데 일제는 이를 ‘가사 노동의 전담자’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1970∼1980년대 산업화 이후 사회와 가정이 분리되고, 성별 노동 분업도 강화되며 남성은 가장(家長), 여성은 주부(主婦) 역할에 묶였다. “조선 남성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는 저자는 입으로는 양성평등을 외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살림과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고 믿는 남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남편들이여, 당신들의 생각은 틀렸다.” 259쪽, 1만5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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