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빈 추모 특집 ② 등반 역정] 30여 년간 27번 히말라야 14좌 원정 시도

글 서현우 기자 2021. 7. 3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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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등반역정

장애인으로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김홍빈 대장은 1989년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부터 2021년 브로드피크 등정까지 총 27번 히말라야 원정을 시도했다. 2006년 7월 22일 히말라야 14좌 중 가셔브룸 2봉을 처음 등정했으며, 이 등정부터 헤아리면 14좌를 완등하기까지 정확히 14년 11개월 27일이 소요됐다. 김홍빈 대장의 히말라야 14좌 등반 역정을 돌아본다.

2006년 가셔브룸2봉(8,035m)
1 2006년 가셔브룸2봉(8,035m)
김미곤 대장과 단 둘이 나선 원정이었다. 김미곤 대장은 텐트 치는 일은 물론이고 배낭을 챙겨 주는 일에서부터 양말과 삼중화를 신고 아이젠과 안전벨트를 차는 일까지 도와줬다. 등반 중에도 직벽과 같은 상황을 만나면 위에서 당겨 주고, 등강기를 이용해 등반할 때는 함께 오르다가 매듭이나 확보물을 만날 때마다 등강기를 다음 로프에 갈아 끼워 주었다. 김미곤 대장은 모든 일을 묵묵히 해줬다.
김홍빈 대장은 “어떤 상황에서든 싫은 표정 한 번 짓지 않는 고마운 후배”라 했고, 김미곤 대장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말 대단한 선배”라고 전했다.
2006년 시샤팡마(8,027m)
2 2006년 시샤팡마(8,027m)
남벽을 통해 셰르파 1명과 함께 정상에 올랐다. 김홍빈 대장은 발라클라바가 자꾸 내려와 불편했지만 보온을 위해 워낙 두터운 장갑을 끼고 있다 보니 제대로 고쳐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코에 동상이 왔다. 새카맣게 죽어 코마저 잘라내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하산 후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샤팡마 등정의 숨은 조력자는 조선대 원정대. 이들이 루트 개척을 주도했다.
2007년 에베레스트(8,849m)
3 2007년 에베레스트(8,849m)
앞선 가셔브룸2봉과 시샤팡마 등반은 이 에베레스트 등반을 위한 고소적응 차원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김홍빈 대장은 7대륙 최고봉 완등 릴레이를 펼치고 있었고 1989년, 2000년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바 있었다.
김미곤, 김창호, 윤중현, 싼누 셰르파와 함께 등반했다. 이들은 힐러리스텝을 포함해 해발 8,400m 높이의 발코니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구간에 고정로프를 깔아 김홍빈 대장이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김미곤 대장은 3일 동안 거의 잠도 못 잔 상태에서 정상에서 김홍빈 대장을 4시간이나 기다려 주기도 했다.
2008년 마칼루(8,463m)
4 2008년 마칼루(8,463m)
박형수, 허정, 하민수 대원과 함께 등반을 펼친 김홍빈 대장은 출국 두 달을 남겨 놓은 시점에 빙벽훈련을 하다가 척추 1번 뼈에 금이 가는 악재를 겪었다. 김홍빈 대장은 “의사는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상사실을 숨긴 채 등반준비를 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했다. 육체의 고통을 이겨낸 김홍빈 대장은 마칼루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2009년 다울라기리(8,167m)
5 2009년 다울라기리(8,167m)
임정용 단장과 밍마 덴지 셰르파와 함께 떠난 등반이다. 현지에서는 전북산악연맹과 함께 등반을 전개했다. 악천후로 등반 조건이 몹시 까다로웠지만 전북연맹팀의 김미곤 대장, 고우석 대원과 함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하산 중 고우석 대원이 실종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하산 도중 쉬고 있던 고 대원이 좁은 길을 지나던 셰르파와 부딪혀 추락했으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2011년 초오유(8,201m)
6 2011년 초오유(8,201m)
2011년 초오유 등반은 한국 등반가들이 저마다 오랜 히말라야 도전의 결실을 수확하는 장이었다. 송원대 팀으로 나선 김홍빈 대장은 부산 희망원정대(대장 홍보성)의 김창호·서성호 대원,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 김재수 대장과 손병우 대원과 함께 정상에 올라섰다.

이 등정으로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이 파견하는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는 2006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5년 4개월 만에 단일팀 세계 최초로 8,000m급 14좌를 완등하면서 최단기간 완등기록도 추가하는 쾌거였다.

김재수 대장은 1993년에 초오유를 등정한 바 있었으나 당시 불법 월경 등반이었기에 공식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때 재등정한 것이었다. 이로서 김재수 대장은 고 고미영 대장과 생전에 한 14좌 완등 약속을 지킬 수 있었고, 명실상부한 14좌 완등자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2012년 K2(8,611m)
7 2012년 K2(8,611m)
K2 등반은 배훈희 대원과 함께 국제상업등반대인 세븐 서밋 프로젝트 등반대에 소속돼 진행했다. 다만 마침 같이 K2가 목표였던 한국도로공사 원정대(김덕중 단장, 김미곤 대장, 나관주 대원, 강동욱 대원 소속)가 비슷한 시기에 등반을 전개해 큰 도움을 받았다. 등반은 물론 식사도 자주 제공했다.
등반 내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악천후가 계속됐다. 국제등반대가 로프작업을 거들어 줬지만 바람이 너무 강해 좀처럼 고도를 높이기 어려웠다. 김홍빈 대장은 한국도로공사 원정대팀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 정상 공격을 감행했다. 셰르파들에게 캠프 철수 지시를 내릴 정도로 사실상 반은 포기한 상태였지만, 극적으로 좋아진 날씨와 잘 유지된 컨디션으로 이내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2013년 캉첸중가(8,586m)
8 2013년 캉첸중가(8,586m)
캉첸중가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원정이었다. 등반 시작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캠프2(6,400m)까지는 순조롭게 구축했으나 캠프3(7,000m) 설치에 애를 먹었다. 기상이 너무 나쁘고 루트 작업하기에 빙하 상태가 나쁜데다가 폭 6m의 크레바스도 앞을 가로막았다.
거듭되는 화이트아웃과 폭풍으로 정상 공격에 2차례나 실패한 원정대는 5일간 날씨가 맑다는 예보를 받고 최후의 정상 공격을 감행, 김홍빈 대장과 박남수 등반대장이 정상에 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산 중 박남수 등반대장이 실족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한다. 박 대장은 캉첸중가 원정 중 늘 김홍빈 대장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이 되어 헌신적으로 등반을 보좌해 줬었다.
다른 원정대원이 추락한 박 대장의 시신을 발견했지만 위로 끌어올릴 수 없어 즉각 수습하지 못했다. 탈진한 상태에 왼쪽 발에 아이젠도 없고, 한쪽 눈은 설맹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지친 상태로 하산하던 김홍빈 부대장은 뒤늦게 사고소식을 듣고 무척 애통해 했다.
2014년 마나슬루(8,163m)
9 2014년 마나슬루(8,163m)
마나슬루는 앞선 2000년, 2010년에 두 차례 정상 등정에 실패했던 산이다. 하지만 2014년 등반은 매우 순조로워 출국한 지 29일, 등반을 시작한 지 단 열흘 만에 나관주 대원과 함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기록으로만 봤을 땐 쾌조의 속도를 보인 순탄한 등반이었지만, 김 대장으로선 마음이 몹시 복잡한 등반이었다. 직전 도전인 2010년 등반 때 마나슬루에서 윤치원, 박행수 두 대원을 히말라야의 품으로 보낸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원정에 동행한 서인석 부단장은 “김홍빈 대장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 이제껏 같이 등반하면서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이름을 울먹이며 불렀다”고 전했다.
2017년 로체(8,516m)
10 2017년 로체(8,516m)
로체는 2015년에 먼저 도전한 바 있지만 네팔 대지진 참사로 포기했던 봉우리다. 이로부터 2년 뒤 김홍빈 대장은 순조로운 고소적응을 위해 대원들과 함께 먼저 임자체(6,189m) 등반을 거쳤고, 이후 로체로 이동해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특히 로체 등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3명의 중증 장애인이 동행했다는 점이다. 이진기 대원은 왼쪽 팔이 없고, 정영웅 대원은 오래전 사고로 몸 왼편이 마비됐으며, 나정희 대원은 상이군경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베이스캠프까지 원정에 동행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도전하고, 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김홍빈 대장은 “두 손이 있을 땐 나만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두 손이 없고 나서야 다른 사람이 보였다”는 말을 남긴 바 있었다.
2017년 낭가파르바트(8,125m)
11 2017년 낭가파르바트(8,125m)
낭가파르바트는 김홍빈 대장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꿈을 품게 한 특별한 산이다. 김 대장은 1990년 대한산악연맹이 꾸린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처음 히말라야에 발을 내딛은 바 있다.
김 대장은 1m 이상 눈이 쌓이는 폭설에 몇 차례 정상 공격에 실패했으나, 수십 번 넘어지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한 끝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 32시간 연속 등반으로 정상에 오른다. 정상 등정 순간 “사진 찍을 힘조차도 없었다”고 할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한 탓인지 김 대장은 하산한 후 위출혈에 따른 빈혈과 혈변 등 일시적인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2018년 안나푸르나(8,091m) 등정
12 2018년 안나푸르나(8,091m) 등정
안나푸르나 원정은 트레킹팀과 함께해 그 규모가 매우 컸다.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하는 트레킹팀에는 의료봉사단도 포함돼 있었으며, 이들은 캐러밴 중 네팔 디무아에 위치한 광주진료소에 들러 뜻깊은 의료봉사 활동을 펼쳤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고 시민원정대들이 25명에 달하는 트레킹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김 대장의 등반이 시작됐다. 캠프2로 옮겨 놓은 장비가 눈사태로 유실돼 다시 네팔 카트만두로부터 공수 받으며 등반이 지연되고, 강풍과 폭설을 뚫고 간신히 능선을 넘으면 또 다시 봉우리가 이어져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날씨가 순간 맑아져서 등반을 감행, 14시간여 만에 등정에 성공했다.
2019년 가셔브룸Ⅰ(8,068m)
13 2019년 가셔브룸(8,068m)
가셔브룸 1봉 원정은 시작이 불길했다. 예기치 못한 폭설로 출국 후 20여 일이 지난 후에야 베이스캠프에 입성할 만큼 등반 스케줄이 지연됐다. 또한 식량·물자 보급도 어려워 캠프1~3을 차례로 개척한 뒤에도 여러 차례 베이스캠프를 오가야 했다.
김홍빈 대장은 2006년,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가셔브룸 1봉 등정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발휘, 2명의 대원과 2명의 셰르파들과 함께 20시간에 걸친 등반 끝에 정상에 설 수 있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8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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