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전국 '입진보' 자랑

이지혜 2021. 7. 30.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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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이지혜 ㅣ경제팀 기자

기자 일을 하다 보면 온갖 욕을 다 먹는다. 그중 내 신경을 가장 건드리는 말은 ‘입진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아니, 내 일이 질문하고 기사 쓰는 건데 입 말고 무엇으로 진보가 되라는 걸까’ 하는 반발심이 들었다. ‘벌써 내 입이 진보가 됐다면 언젠가는 온몸 진보도 될 수 있는 걸까?’ 하는 느닷없는 궁금증도 들었다. 이내 마음은 찜찜해졌다. 왜 세간에선 <한겨레>와 이곳에서 기사를 쓰는 나를 입진보라 낮춰 부를까. 입진보란 과연 뭘까. 지속가능한 기자생활을 위해 용례를 탐구해본 결과, 이 표현은 생각보다 다의적 개념으로 여기저기서 남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입진보의 혐의는 크게 세가지 정도다. ①‘내로남불 진보’. 가장 범국민적으로 쓰인다. 남들에게는 각종 도덕적 훈계를 늘어놓으며 진보성을 뽐내지만 사실 자기 삶의 실천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 대상이다. 특히 진보의 가치 자체보다 진보의 도덕성을 평하길 좋아하는 보수 진영에서 이 표현이 자주 나온다.

두번째 ②‘진보 장사꾼’. 스탠스는 시대착오적인데 수구 보수와 겨루어 ‘상대적 진보’의 자리만 계속 점유하려는 이들에게 보내지는 야유다. 이들은 권력을 쥘 수 있을 때만 ‘진보’의 깃발을 들었다가, 정작 치열한 진보 의제 앞에선 “나중에”를 외치며 현실주의자로 돌변하곤 한다. 보수세력 타도가 곧 진보라고 보는 납작한 생각 탓이다.

마지막으로 ③‘선비질 진보’. 현실과 동떨어진 원론적 주장을 되풀이하며 훈계와 반대만 일삼는 이들을 일컫는다. 내세우는 대안은 어설프게 과격하거나 민망하게 소소하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화할 전략이 없다. 그 주장이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더라도 ‘무척 진보적인 나’를 확인하면 그만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진보 진영 안에서 쓰일 때 이 말들이 더 치명적이라는 데 있다. 주로 ②번과 ③번의 상호 비방전이 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묘사일지언정 진보 진영 내에 이 혐의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이가 과연 있을까? 나를 향한 손가락질은 주로 ③번 혐의와 관련된 것이다. 이런 모욕에도 일말의 진실은 담겨 있다. 나 역시 그리 당당하지만은 않다. 기자가 된 뒤 받게 된 숱한 모욕 중에서도 입진보라는 말이 가장 거슬렸던 건 아무래도 이 표현이 날 가장 아프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사가 어쩌면 아무런 설득도 해내지 못하며, 이미 그 논조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박수만을 겨우 받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런 안일함이 모여 노동조합이나 페미니즘 등 진보 운동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①번과 ②번의 혐의를 받는 이들 역시 새겨들을 대목이 있을 테다.

그럼에도 ‘입진보’라는 비방에서 더 나은 진보의 가능성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단어엔 진보의 미래를 위한 성찰 대신 진보의 파국을 향한 적개심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시대의 진보인가’가 아니라 ‘누가 진짜 입진보인가’만 남은 논쟁장은 비아냥이 지배한다. ②의 세력은 ③의 세력을 정무적 전략 없이 ‘팀킬’을 해서 결국 보수를 이롭게 하는 배신자라고 보는 듯하다. ③의 세력은 ②의 세력을 보수 세력과의 적대적 공존으로 진보의 잠재력을 갉아먹는 기득권이라고 여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함정이다. 그저 상대방을 ‘입진보’로 만들어서 자기가 ‘참진보’가 되려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이 함정에 빠진다. 어떻게 해야 입진보가 아니라고 입증할지 골몰하고, 나아가 ‘나보다는 저 사람들이 더 입진보 같습니다’라고 혐의를 떠넘기고 싶어진다. 입진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찜찜함의 정체는 인정받고 싶은, 적어도 비난받고 싶진 않은 내 안의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참진보’ 인정투쟁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역시 치열한 투쟁이 필요하다. 나는 오래오래 기자로 일하기 위해 그것에 애써보기로 했다. 내가 뭐라고 불리는지는 뒤로하고, 좀 더 구체적인 사안에 집중하면서 진보적인 가치를 살피고 지금 필요한 변화에 성큼 다가갈 수 있도록 말이다.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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