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그리운 홍콩의 화양연화

황지윤 기자 2021. 7. 3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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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감독 왕자웨이(王家衛)의 영화 ‘화양연화’(2000).

중∙고등학교 시절 홍콩 감독 왕자웨이(王家衛)의 영화에 빠져 살았다. 수능을 치르자마자 함께 ‘덕질’하던 친구와 예식을 치르듯 2박 3일 홍콩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피날레는 코즈웨이 베이의 40년 전통 ‘골드핀치 레스토랑’. 대표작 ‘화양연화’(2000)에 두 차례나 나온 곳이니 가야만 했다. 각자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 두 남녀가 ‘맞불륜’을 시작하는 장소다.

영화 속 장만위(張曼玉)와 량차오웨이(梁朝偉)처럼 마주 보고 앉아 스테이크를 시켰다. “입에 맞아요?” 접시에 겨자를 덜어주며 묻자 친구는 능숙하게 받아쳤다. “아내가 매운 걸 잘 먹나 봐요.” 한국말을 알아들었을 리 만무했지만, 따로 겨자를 요청한 순간부터 웨이터들은 킥킥 대기 시작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챈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따라 한 ‘찐덕후’들은 없었던 모양이지….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 건 암울한 코로나 시국에 얻은 몇 안 되는 수확 중 하나다. 지난 연말 ‘화양연화’를 시작으로 올 초 ‘중경삼림’(1994), ‘해피투게더’(1997), ’2046′(2004)까지 줄줄이 재개봉했다. 한산하다 못해 썰렁한 영화관에서 왕자웨이 영화를 고화질 리마스터링 판으로 다시 보는 호사를 누렸다. 특유의 미장센에 넋을 놓았던 과거와 달리 곳곳에 숨겨진 은유를 자꾸 곱씹게 됐다.

꽃처럼 아름다웠던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는 반환 전 홍콩에 대한 애정을 담은 작품이다. 문화혁명의 영향으로 정치적 격랑에 휩싸였던 1960년대 홍콩. 두 남녀는 호텔방 ’2046′호에서 무협소설을 쓰며 사랑을 나눈다. 잠깐의 외도였지만 그때 그 시절은 두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불온했지만 아름다웠던 사랑.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과거. 홍콩 지식인들에게 영국과의 외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홍콩 감독 왕자웨이(王家衛)의 영화 ‘화양연화’(2000), ‘2046’(2004).

“지나간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영화 끝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후속작 ’2046′의 주제로 이어진다. 옛사랑의 공간이었던 2046은 모든 것이 영원한 미지의 공간으로 새롭게 변주된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2046행 열차에 오른다. 불안한 미래를 향하는 이들은 과거를 붙들고 놓지 못한다. 2046년은 일국양제(一國兩制∙1국가 2체제)가 끝나 홍콩의 자치권이 완전히 사라지는 해이기도 하다.

홍콩의 2046년은 성큼 앞당겨졌다. 반중(反中) 행위를 감시∙처벌하도록 한 홍콩보안법이 지난해 통과되면서다. 최소 100여 명 이상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교육과정이 바뀌었고, 공공 도서관에서 몇몇 책은 자취를 감췄다. ‘홍콩 엑소더스’도 하나의 현상이 됐다. 이 때문인지 홍콩이민법이 개정돼 다음 달부터 홍콩입경처(출입국관리소)장이 직접 출입을 관리한다. 반체제 인사는 물론 홍콩을 떠나는 시민도 출국 금지 대상이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지난달엔 홍콩의 반중 성향 신문 빈과일보가 자진 폐간해 국제적 화제가 됐다. 그에 앞서 몇 주 전 중국 본토 기준에 따라 홍콩 영화 검열 지침도 개정됐다. 체제 전복이나 분리 독립, 테러, 외세와의 결탁 등을 지지·미화·선동하는 영화는 틀 수 없다. 노골적인 검열 탓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술 시장’이라는 칭호도 무색해지고 있다. 보안법 시행 1년 만에 사회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친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화번호 뒷자리로 ’2046′을 쓴다. 홍콩의 근황을 안부 인사처럼 주고받곤 하늘길이 열리면 다시 홍콩을 찾자고 이야기했다. 다시 마주할 홍콩의 모습이 어떨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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