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허익범이 무너뜨린 ‘여론의 법정’

최재혁 사회부 부장대우 2021. 7. 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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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圈, 자기편 유죄 때마다 ‘여론 법정’ 소집해 무죄 강변
본분 지킨 이들에 점점 무너져 또다른 ‘허익범’들 역할 할 것

지난주 김경수 전 경남지사에게 징역 2년형이 확정되자 한 여권 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김경수는 무죄”라고 했다. 그러면서 “드루킹이 놓은 덫에 김경수가 걸린 것 같다. 드루킹 배후로 짚이는 것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덫에 걸렸다고 하면 드루킹과의 공모 관계를 인정하는 격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했다. 이 여권 인사는 6년 전(前) 징역 2년이 확정돼 형(刑)을 다 살고 나온 한명숙 전 총리도 억울하다고 했다. 오랜만의 통화를 좋게 끝내기 위해 반박을 하려다 말았다.

드루킹과 공모해 댓글 여론조작 혐의로 2년 실형이 확정된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26일 오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창원교도소 앞에서 입감 전 발언하기 위해 걸어나오고 있다./김동환 기자

지금 정권을 쥔 이들에겐 두 개의 법정이 있다. 기소된 정권 인사가 실제 서는 ‘법률의 법정’과, 불리한 판결이 나올 때 그 판결이 피고가 되는 ‘여론의 법정’이다. 견제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출범한 이번 정권은 두 법정을 쥐락펴락하며 기세등등했다. 1심이든 2심이든 ‘법률의 법정’에서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이 나오면 목소리 큰 여권 사람들이 방송과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여론의 법정’을 소집하고 ‘비상식’으로 점철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재주를 부렸다. 시민사회에서 작동해야 하는 합리적 소통과 반성적 사고(思考)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조국 일가 수사는 검찰 개혁 저지용’이란 허황한 논리의 생태계가 바로 그렇다. “유시민씨는 이미 (조국 딸이 받은) 동양대 표창장이 위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가 알려줬거든요. 흥미로운 건 그가 취한 태도예요. 표창장이 실제로 가짜라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대안적 사실’을 제작하여 현실에 등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사실이 된다는 거죠. 그게 가능하다며 나를 안심시키기까지 했어요.” ‘조국 흑서’에 나오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말이다. ‘김경수 1·2·3심 유죄’를 비난하는 여권 인사들 심리도 유시민씨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천지’도 허익범 드루킹 특검, 윤원일 검사 같은 이들에 의해 균열이 가고 있다. 허 특검은 기울어진 사법 시스템 안에서 오로지 증거에 천착, ‘정권의 이인자’와의 법정 싸움에서 사실상 완승했다. 윤원일 검사는 당초 법무부가 찍어서 허익범 특검팀에 보냈던 검사들 중 한 명이다. 윤 검사는 증거 수집과 단서 포착에 탁월했다고 한다. 이후 윤 검사는 검찰에 복귀하면서 서울중앙지검을 희망했으나 법무부는 수원지검 안양지청으로 발령 냈다. 정권 수사를 열심히 했다는 뒤끝이었을 것이다.

반전(反轉)이 벌어졌다. 안양지청에서 윤 검사는 ‘김학의 전 차관에게 출입국 정보를 유출한 법무부 내부인을 찾아내라’는 법무부 수사 의뢰 건을 처리하다가 현직 검사가 연루된 ‘김학의 긴급 출금 서류 조작’을 잡아냈다. 그는 입건 수사의 필요성을 대검에 보고했다가 주임검사에서 교체됐다. 이는 2년 뒤 당시 윤 검사의 직속 상관이었던 장준희 부장검사의 공익 제보와 수원지검 수사로 이어졌다. 윤 검사가 남겨 놓았던 선명한 증거들은 청와대와 법무부·검찰 실세들을 수사·기소하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정상 사회라면 한쪽에서 힘으로 본질을 왜곡하면 이를 바로잡으려는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 정권 들어서 그런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허익범 특검을 3시간 가까이 인터뷰하면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뒤틀려 있는 ‘여론의 법정’에 구애받지 않고 묵묵히 상식과 원칙을 따르고, 뒷사람들을 위해 발자국을 남겨 놓은 공직자들이 많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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