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 기자의 도쿄 다이어리] 도쿄는 가만히 있는다, 그래서 힘들다

도쿄/양지혜 기자 2021. 7. 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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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列島)는 요즘 그야말로 열도(熱島)다.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도쿄의 한낮 최고기온은 서울(35~38도)보다 살짝 낮지만(31~34도), 도쿄만에서 불어오는 두툼한 습기가 더해져 체감 온도 40도를 넘나든다. 그늘도 드물어 바깥에 5분이라도 서있으면 녹아내리는 껌이 된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를 참다못한 미국 폭스스포츠는 “일본은 도쿄올림픽 유치를 신청할 때 ‘7~8월이 온화하고 맑은 날씨’라고 거짓말했다. 세계는 일본의 사과를 원한다”고 비판 기사를 냈다.

실외 경기 선수들에게 이런 더위는 재앙이다. 남자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선수들은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집단으로 구토했고, 달궈진 모래 위에서 경기하는 비치발리볼 선수들은 화상 입은 것처럼 발바닥을 다쳤다. 여자 양궁 스베틀라나 곰보예바(러시아올림픽위원회)는 예선 경기에서 열사병으로 쓰러졌고, 남자 스케이트보드 최강자 나이자 휴스턴(미국)은 대회를 7위로 마치고 “너무 뜨거워서 보드가 휘어버려 제대로 경기할 수 없었다”고 억울해했다.

아스팔트가 섞인 테니스 경기장 바닥은 한낮 최고 50도까지 올라간다. 여자 단식 파올라 바도사(스페인)는 8강전을 치르다 열사병으로 휠체어 타고 기권했고, 모나 바델(독일)은 서브 토스를 올렸을 때 햇빛 눈부심으로 공을 제대로 못 봐 더블 폴트를 10개나 저지르고 첫판 탈락했다.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코트 체인지 시간을 30초 더 늘렸고(최대 90초), 세트 간 휴식 시간도 유례 없는 10분으로 만들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테니스 선수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28일 남자 단식 16강전을 치른 다닐 메드베데프(러시아올림픽위원회)는 두 차례나 메디컬 타임아웃을 썼고, 주심에게 “지금 죽을 것 같은데 내가 경기하다 죽으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어렵사리 8강에 진출한 그는 “이런 더위에 경기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습도 때문에 심장이 꽉 막힌 기분이라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남자 세계 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는 한여름에 열리는 호주오픈에서 8차례 우승할 정도로 무더위 테니스에 익숙하지만, 도쿄에서 첫 경기를 하고선 “살면서 경험한 더위 중 가장 혹독하다. 경기장에 야간 조명도 다 있는데 왜 한낮에 경기하느냐”고 따졌다. 선수들이 계속해서 문제 삼자 조직위는 29일부터 테니스 경기 시작 시간을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로 바꿨다. 문제를 제기하자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가만스루(我慢する·참는다)’한다. 참고 또 참는다. 한번 정해진 사안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을 뿐 결코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도쿄 올림픽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온갖 파열음은 가만히 있어서 벌어진 비극이다. 가령 도쿄올림픽 개회식에서 자원봉사자용 도시락 4000개가 뜯지도 않고 버려졌고, 이후에도 경기장마다 30%가량 도시락이 폐기 처분된다는 사실이 최근 들통났다. 이는 올림픽 여론 악화로 자원봉사자들이 줄줄이 사퇴해 도시락 수요에 큰 변동이 있었는데도 한번 정해진 사항은 그저 가만둘 뿐 아무도 책임지고 바꾸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선수들이 선수촌 골판지 침대가 좁고 불편해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소연해도 조직위원회는 그저 가만히 있는다. 땡볕에 노출된 자원봉사자들이 기절 직전인데도 누구 하나 파라솔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안 한다. 최근 중국은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1500만명 생겼고, 미국엔 폭염이 들이닥쳐 강물 속 연어들이 산 채로 익어간다. 세계는 갈수록 예측 불가능해지고 극단적으로 변해가는데 도쿄는 여전히 가만히 있는다. 그래서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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