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한때 미 核실험장’이던 나라?

정지섭 국제부 차장 2021. 7.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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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청 앞 오피스텔에 주한 마셜제도공화국 대사관이 있다. 식당과 카페, 편의점 간판이 붙은 건물 입구에 태극기와 이 나라 국기, 그리고 대사관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달려 있다. 오피스텔 사무실을 쓰는 대사관은 인구(6만명)와 면적(제주도 10분의 1)처럼 아담하다.

MBC가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 중계방송에서 마셜제도 입장 때 미국의 핵실험장이라는 문구로 소개하고 있다./MBC

작은 나라지만 한국과 인연은 깊다. 초대 대통령 아마타 카부아가 노랫말을 쓰고, 그와 친분이 있던 길옥윤이 곡을 붙인 ‘마셜제도는 영원하리’는 한국 대중음악가가 외국 국가를 작곡한 아주 특별한 사례다. 마셜제도는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 징용자가 노역에 동원된 지역이다. 2014년 부임한 초대 대사도 현지 여성과 한국 징용자 사이에 태어난 중진 정치인이었다.

미국 신탁통치를 거쳐 1986년 독립한 이 나라 역사엔 핵실험 상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비키니 수영복의 유래가 된 1946년 미 핵실험 지역 비키니 환초가 마셜제도 땅이다. 1958년까지 일대에서 67차례 진행된 핵실험으로 많은 주민들이 터전을 잃고 강제 이주당했고 핵실험 후유증을 겪었다. 아픈 역사를 담은 핵실험지는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런 역사를 가진 마셜제도는 핵무기 반대 목소리를 높여왔다.

마샬제도 비키니 환초에서 일어난 핵 실험 모습/pixabay

2014년 마셜제도 정부는 미국·러시아·북한 등 핵을 보유하거나 개발한 아홉 나라를 유엔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이 나라들이 핵확산방지협약 준수를 위반하고 군비 경쟁에 몰두해 중단시켜야 한다는 취지였다. 같은 취지로 버락 오바마 당시 행정부도 미 연방 법원에 제소했다. 재판 실효성과 별개로 핵실험으로 고통받은 작은 섬나라의 결기는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마셜제도가 자국의 7번째 해외 공관으로 2015년 12월 주한 대사관 개관식을 열었을 때는 이 나라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주의 깊게 지켜봐왔다. 협력을 강화하자”고 축사를 했다.

마셜제도가 지난 23일 도쿄올림픽 개회식에 입장할 때 국내 한 방송사는 ‘한때 미국의 핵실험장’이라는 자막으로 소개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사진’에 못지않은 커다란 외교적 결례였다. 이 방송사는 26일 사장이 나선 사과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대사관과 축구 경기 조롱 자막으로 논란을 일으킨 루마니아 대사관에 사과 서한을 넣었다고 밝혔다. 기왕 사과에 나선 김에 서울에 외교공관을 둔 주한외교단 일원인 마셜제도 대사관에도 유감을 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올림픽 개회식 선수단 입장은 땅덩이와 인구는 제각각이어도 지구촌 각국이 동등한 국제사회 구성원임을 확인하는 자리다. 마찬가지로 자국 예산을 들여 서울에 대사관을 둔 110여 국가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우리의 중요한 외교 파트너다. 이런 당연한 상식이 결여된다면 공공에서든 민간에서든 국제 망신·외교 참사가 반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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