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김정수의 시톡 (1)]

2021. 7. 2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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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은 너무 길다 딱, 사흘만"
[주간경향]

죽음은 무채색입니다. 여러 색깔을 덧칠해 무슨 색인지 구별할 수가 없지요. 당연히 그 안을 들여다볼 수도, 안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을 때 ‘급작’이라는 상황이 더해지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황망해집니다. 울음은 ‘마음의 진공’ 다음에 찾아오는 내적 반응일 것입니다. 김길녀 시인(1964~2021)이 삶에서 죽음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겪은 일이지요. 지상에 남겨진 이들의 슬픔과 황망, 흐느낌과 달리 산책을 끝낸 시인은 의외로 덤덤했나 봅니다. 두 번의 암 투병을 한 시인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애지)이라는 시집을 남겼습니다. 시인은 시집이 나오기 8일 전 우리 곁을 떠났고, 네 번째 시집에는 ‘유고’라는 수식어가 붙고 말았습니다.

김길녀 시인(위)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시인의 죽음은 장례라는 의식을 치르고 난 다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내가 아픈 것을, 내 죽음을 주변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는군요. 마음속에서 시인을 보내고 열흘쯤 지났을 때, 저자의 서명 없이 보낸다는 안내문과 함께 주인 없는 시집이 도착했습니다. 한동안 뜯어볼 엄두가 안 나 멀찍이 밀어두었습니다. 강원도 삼척이 고향인 시인은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와 부산에 살다가 서울 홍제동에서 “세 번의 겨울”(‘장소의 탄생’)을 보냈습니다. 시인이 생각한 홍제동은 “눌러앉아 남은 생/ 사과나무같이 늙어가고 싶은/…/여행자들의 발자국/ 긴 쉼표를 찍는 여기”(‘3호선 홍제역’)입니다.

남루하지 않아 더 슬픈 생애

생각난 듯, 소나기가 내리던 날 밤에 시집을 개봉했습니다. 책날개에 약력 아래에 e메일 주소가 있었습니다. 아, 여기로 e메일을 보내면 받아볼 수 있는 건가요. 천국이 그리 가까운 곳이었나요. 간지는 왜 또 검정일까요. 수록된 첫 번째 시는 “내 아픔이 치유되자 그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반성’)라는 단 한 줄입니다. “아픔이 치유”됐다는 것은 몸의 병(病)이 아닌 마음의 병으로,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누구일까요.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 가족 중 한 사람인 남편일 것 같습니다. 시인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한 게 아닐까요. 시인은 “남루하지 않아서 더 슬픈 누군가의/ 생애를 들여다”(‘오후의 사과나무- 봄’)봤을 것입니다. 암이 재발한 후 경남 밀양집에 머문 시인은 “눈곱쟁이 창문”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감지했겠지요. “서서히 죽어가는 누군가의 일기처럼”(‘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시간이 느리면서도 빨랐을 것입니다.

시인은 ‘수목장 산책’이라는 시를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시인의 바람대로 “생의 긴 시간을 함께한 세 사람”, 즉 딸과 아들 그리고 남편만이 참석해 “장례식 없이” 조용히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형제자매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는군요. 밀양집 주목 아래 묻혀 한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인은 죽음을 ‘산책’이라 했습니다. 이제 고요히 “주목나무와 함께/ 사계”를 느낄 것 같습니다. 한겨울 폭설에 시인은 “더는 가릴 수 없는/ 무덤 천지”라며 “더도 버릴 것도 없는/ 삶의 무게”를 느낍니다. “온몸으로 하늘로/ 하늘로 길을 내”(‘성채’)는 “중국 산성/ 우타이산 가는 길”에 만난 노승처럼 “비로소 고요”해지기도 하겠지요.

묘비명, 미완성 교향곡 1964

묘비명이 빠질 수 없겠지요. 시 ‘묘비명’에는 ‘미완성 교향곡 1964’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1964는 시인이 이 세상에 온 해이므로, 시인의 삶은 “남겨두고 떠나도 좋”을 “못다 부른 노래”입니다. 죽음을 직감한 순간부터 정갈한 죽음을 준비했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감정이 만져집니다. “살고 싶어지는 오늘과 죽기 좋았던 어제”(‘장소의 탄생’)만큼이나 심장을 쿡쿡 찔러댑니다. “식물로 태어나 나무로 살아가는/ 오래된 생애”(‘지금,’)가 부러워 수목장일까요.

시인은 시 ‘보들레르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 저녁’에서 “당신을 만날 어둠을 기다”린다며 “미처 살아내지 못한 생의 행간이 있다면 낯선 땅에서 보내는 긴 휴가 속에서 기꺼이, 다시 시작해 볼까 싶”다고 했습니다. 시 ‘만첩홍도’에서는 “열흘은 너무 길다/ 딱,/ 사흘만/ 내 남자로/ 머물다 가시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겹겹이 쌓은 붉은 문장”의 세계에서 바람을 이루었을까요. “엄마 흉내쟁이 셋째”(‘현모양처’)는 “이쪽 별에서/ 저쪽 별로/ 먼먼 여행”을 떠난 엄마를 만났을까요. 죽음은 안을 보여주지 않으므로 확인 불가입니다. 겨울 지나 봄이 찾아오면, 밀양 주목 앞에 서서 시인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 등이 있다. 제28회 경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과 2018년 아르코창작기금을 받았다.

시 한편
수목장 산책
김길녀

여자는 유언으로 부고 알림
장례식 없이 주목나무와 함께
사계를 느끼고 싶어 했다

여자의 바람대로 생의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세 사람
조용하게 여자와 작별식을 가졌다

일 년에 한번 그날이 오면
여자가 애정했던 고요,
아꼈던 찻잔에 담아
하루는 맑게 쉬었다 가시라



시인의 말

▲왜 오늘 밤은 내일 밤과 다른가요
김혜선 지음·파란·1만원

마그리트의 모자를 훔쳐 와
낙타에게
당신에게 씌우고
쓸모없이
날아오를 새를 기다린다.
처음은
내가 없는 줄도 몰랐으니까.



▲그리움의 총량
허향숙 지음·천년의시작·1만원

매 순간 돌아봄과 넘어짐의 연속이었다. 너 없는 세상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일은 용광로에 던져지는 형벌과도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사라지지 않는 숨 때문에 천년의 잠을 청하며 잠들곤 했었다.



▲우리의 소통은 로큰 롤
김송포 지음·상상인·1만원

백팔 마리 고양이가
형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소리로
노래로
혹은 그 너머로
얼굴은 있다, 없다.



▲각을 끌어안다
김금용 지음·현대시학·1만원

빗장 열고
꽃 피우고 꽃 진 자리
털어내고 길 나서네.



▲사는 게 다 시지
유기택 지음·달아실·8000원
살았다.



▲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
조혜경 지음·모악·1만원

어떤 기도는 춥습니다.
어떤 기도는 버려졌고,
불에 타거나 부서졌습니다.
이 모두를 어루만지시는
나의 하나님께 이 시집을 바칩니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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