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생존자도 볼 수 있는 성폭행 영화가 돼야 했다"..<갈매기>의 김미조 감독 [인터뷰]

백승찬 기자 2021. 7. 2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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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성폭행을 다룬 많은 영화들은 성폭행 장면을 상세히 묘사한다. 피해자가 고통당하는 순간을 처절하게 그릴수록 관객의 감정을 이입시키기 좋다는 듯한 전략이다.

<갈매기>는 그렇지 않다. 주인공 오복(정애화)이 성폭행을 당하기 전 화면은 까맣게 암전된다. 이튿날 오복이 지하철 계단을 엉거주춤 힘겹게 오르는 장면, 뒤따라오던 행인이 하혈이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 오복이 공중목욕탕에서 속옷을 거칠게 빠는 장면 등으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오복이 큰딸(고서희)에게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는 순간조차 카메라는 멀찌감치 물러나 관객은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없다. 큰딸의 충격받은 듯 멍한 표정이 대화 내용을 암시한다.

영화 <갈매기>의 한 장면. 오복이 큰딸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순간에도 관객은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다. | 영화사 진진 제공
첫 장편 영화 <갈매기>를 내놓은 김미조 감독 | 영화사 진진 제공

김미조 감독(32)의 첫 장편 <갈매기>는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이다. 26일 서울 종로에서 만난 그는 성폭행 장면을 찍어야 하는 감독의 윤리적 고민을 털어놓았다.

“현장에서 오케이 혹은 엔지라고 말해야 하는데, 성폭행 장면이 좋은 장면인지 나쁜 장면인지 얘기할 수 있을까요. 시나리오 쓰면서 오복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졌고, 오복이 고통받는 장면을 찍으며 제가 행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고요. <갈매기>는 성폭력 생존자도 볼 수 있는 영화가 돼야 했습니다. 성폭력을 상세히 묘사하는 영화를 피해자가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큰딸의 결혼을 앞둔 시장 상인 오복의 행적을 따른다. 평생 좋아하지도 않는 생선을 팔며 자식들을 키운 오복은 회식 이후 동료 상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오복은 사과를 받고 싶어하지만, 다른 상인들은 “한강에 배 한 번 지나간 게 대수냐” “젊은 사람 발목 잡아 좋을 게 뭐 있냐”고 오복을 만류한다. 게다가 가해자는 시장 재개발 반대 투쟁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복은 딸의 도움으로 가해자를 고소한다. 경찰이 증거 혹은 증인을 요구하자, 오복은 자신을 위해 증언해줄 이를 찾아나선다.

<갈매기>에는 한국사회 내 성폭력을 둘러싼 문제점들이 함축돼 있다. 김 감독은 영화를 구상하면서 수많은 성폭력 사례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녹취록 등을 읽었다. 기획을 시작한 2018년에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등이 발생했다. 투쟁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성폭력쯤은 눈감아도 된다는 태도,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지난한 사법처리 과정 등이 영화 속에서 재현된다.

영화 <갈매기>의 한 장면. 오복에게 2차 가해를 하는 동료 상인의 모습은 실제로 한 공인의 성폭행 사건에서 벌어진 2차 가해 사례에서 따왔다. |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갈매기>의 한 장면. 오복은 동료 상인들과 시장 재개발 반대 투쟁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상인들은 오복의 피해 사실이 알려지고 투쟁에 지장이 생길까봐 우려한다. | 영화사 진진 제공

김 감독은 오복이 “수동성에서 적극성으로 향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처음 산부인과에 갔을 때는 단지 ‘출혈’ 때문에 왔다고 적고, 다음엔 딸의 손을 빌려 고소장을 작성한다. 결국 오복은 스스로 피해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한다. 김 감독은 결말을 어떻게 내야 할 지 숱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오복이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는 결말, 오복의 남편이 가해자를 찾아가 때리는 결말 등도 생각했다. 결국 “오복이 주체적으로 표현되면서도 품위있게 항의하는 현재의 결말”을 택했다.

영화 <갈매기>의 한 장면. 두 딸은 어머니의 피해 사실을 알고는 어머니를 적극 돕는다. |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갈매기>의 한 장면.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은 오복이 성폭행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는데 머뭇거리게 하는 요소다. |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의 목적을 위해 미학적 욕심은 자제했다. 현장의 효율성을 위해 각 씬 당 샷의 개수를 3개 이하로 제한하고, 카메라는 최대한 고정한 채 찍었다. 인공적인 조명도 지양했다. 김 감독은 “많은 샷을 찍기 위해 번거롭게 움직이며 시간에 쫓기기보단, 배우들과 대화할 시간을 갖기 원했다”며 “상황이 요동치는데 카메라는 고정돼 있으면 아이러니가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영시간은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절반 가량인 74분이지만, 단순하다기보다는 간결하다. 김 감독은 “인물들이 스테레오타입처럼 느껴져도 상관 없다”고 했지만, <갈매기>는 계몽적·교육적 텍스트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다. 김 감독은 <바보선언>(이장호 감독), <꼬방동네 사람들>(배창호 감독),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감독), <우묵배미의 사랑>(장선우 감독) 같이 거칠지만 기세 좋은 옛 한국영화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갈매기>는 포스터의 굵직한 제목 타이포그래피조차 힘이 넘친다.

제목이 ‘갈매기’인 이유는 자유롭게 날 수 있지만 결국 육지 곁을 맴도는 갈매기가 엄마의 상징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 감독이 차기작으로 준비중인 시나리오도 엄마와 딸들이 복수를 위해 누군가를 찾아가는 로드무비다. <갈매기>는 28일 개봉한다.

영화 <갈매기> 포스터. 제목의 타이포그래피는 1970~80년대 한국영화 포스터에서 볼법한 힘찬 글꼴을 따왔다. | 영화사 진진 제공
김미조 감독 | 영화사 진진 제공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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