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무관심 버티고 따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5점
낮에는 일하고 퇴근 후에 훈련
최강 뉴질랜드에 5대50으로 패배
득점 성공하자 선수들 엉켜 환호
한국 남자 럭비가 26일 올림픽에 데뷔했다. 올림픽 럭비는 전·후반 7분씩 양팀 7명이 맞붙는 7인제로 열린다. 한국의 도쿄 올림픽 A조 조별리그 첫 상대는 검은 유니폼으로 유명한 ‘올 블랙스(All Blacks)’ 뉴질랜드. 뉴질랜드 럭비는 세계 최강으로 축구의 브라질 위상과 맞먹는다. 반면 한국은 럭비 실업팀이 3개(한국전력공사·포스코건설·현대글로비스)뿐인 나라. 럭비 강국 일본이 올림픽 개최 자격으로 아시아 예선에서 빠진 덕분에 이번에 출전권을 따냈다.
오전 10시, 긴장한 얼굴로 일본 도쿄스타디움 잔디에 선 한국 선수들은 1954 스위스 월드컵을 떠올리게 했다. 월드컵에 처음 데뷔했던 한국 축구 대표팀은 첫 상대였던 당대 세계 최강 헝가리에 0대9로 졌다. 그런 경기는 미약하지만 창대할 역사의 시작으로 기억된다. 1923년 시작한 한국 럭비는 무관심 속에서도 98년을 버텨 올림픽까지 나왔다.
한국이 0-7로 뒤진 전반 5분 48초, 정연식이 오른쪽 라인에서 장용흥의 공을 넘겨받아 20m를 질주해 뉴질랜드 골라인까지 돌파했다. 5점짜리 트라이(Try·미식축구의 터치다운과 유사) 성공. 한국의 올림픽 첫 득점이 나오자 선수들이 서로 엉켜 역사적인 순간을 자축했다. 이어진 컨버전 킥(보너스 킥)은 실수해 2점을 더 보태진 못했지만, 전반을 5-14로 마무리하며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후반들어 체력이 확 떨어졌다. 이유가 있었다. 럭비 대표팀은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훈련장이 전부 폐쇄되고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이 발동되면서 10개월 넘게 전혀 손발을 못 맞추고 각자 알아서 운동하며 지냈다. 실업팀 선수인 까닭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직장에서 일하고, 출근 전 새벽이나 퇴근 후 저녁에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심지어 도쿄올림픽 취소설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매일 ‘올림픽 취소’ 뉴스 검색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기적같이 따냈던 올림픽 데뷔 티켓이 물거품될까 봐 초조했다. 올 초에야 진천 선수촌에 다시 모여 벼락치기로 몸을 만들었는데, 그래도 메울 수 없던 지난 1년의 공백이 후반전에 짙게 나타났다. 여기에 주장 박완용과 장용흥이 경고를 받고 2분간 퇴장당하는 악재가 겹치면서 대량 실점을 허용했다. 경기가 끝났을 때 전광판 숫자는 5대50을 가리켰다.
한국은 이날 오후 열린 호주와 조별리그 2차전에선 5대42로 졌다. 0-28로 지고 있던 후반 2분21초, 귀화 선수 안드레 진이 트라이를 성공시켜 5점을 만들었다. 한국 럭비는 결코 영봉패를 용납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심장이 곧 터질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도쿄 올림픽에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한국 럭비에 미래가 있다는 절박함으로 뛰고 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테니 응원을 많이 보내달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 럭비는 27일 오전 10시 아르헨티나와 남은 A조 경기를 펼치고, 28일엔 순위 결정전을 치른다. 12개 나라가 나왔는데 절대 꼴찌는 안 하겠다는 각오로 불탄다. 사방에서 욱여싸도 기어이 돌파하는 남자들이 말했다. “한⋅일전이 성사된다면 그 경기 만큼은 반드시 이길 겁니다. 꼭 지켜봐주세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