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재상까지 오른 왕실 매잡이들.. 북방지역 정치제도 특징 보여줘

2021. 7. 2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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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원정 통해 유라시아 전역 확산
13세기 몽골제국 시기에 가장 성행
16세기 유럽 귀족여성들도 적극 참여
대륙 곳곳서 송골매 등 희귀종 거래
수백마리 운영 자체 '부와 권위' 상징
삼국시대 활발.. 백제귀족 日에 전파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등재
프레데릭 2세의 책 '새들을 이용한 사냥 기술에 대하여(De arte venandi cum avibus)'의 삽화.
인도 무굴제국의 왕자와 그의 사냥매를 묘사한 세밀화. 어떤 이들은 이 인물이 악바르(Akbar) 대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광태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⑤ 중앙亞, 과거를 넘어 미래로 - 중앙유라시아의 매사냥 풍속(4)

2016년 우리나라를 포함한 19개 공동 발의로 유네스코(UNESCO)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매사냥(Falconry)은 역사문헌, 회화, 고고학 자료를 보면 중국,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이집트, 유럽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활발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주나 귀족의 특권으로서 매사냥 관습은 13세기 무렵에는 유럽의 십자군 원정과 몽골 제국의 팽창을 통해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매사냥은 특히 중앙유라시아 정치 제도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북방지역에서 인기 높았던 매사냥 풍습과 사냥매 거래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본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매를 길들여 사냥에 이용하는 매사냥(Falconry)은 옛부터 인류가 즐기던 스포츠·레저 활동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Horus) 신이나 앗시리아 사르곤(Sargon) 2세의 무덤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매사냥의 역사는 늦어도 기원전 수 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보다 매사냥이 활발히 행해졌던 지역은 북방지역, 즉 중앙유라시아의 초원, 사막 및 삼림지대였다. 유목민을 포함한 중앙유라시아의 주민들은 과거 수렵 생활의 습속을 이어받아 사냥, 특히 매사냥을 즐겼다. 이들에게 사냥매는 주위에 자랑할만한 귀중품·사치품이었다.

이러한 북방지역의 매사냥 풍습은 유목 국가가 성립되면서 정치 행위로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추운 지방이나 산악지대에서 서식하는 매를 잡아 훈련하고, 이를 사냥에 이용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을 가진 인력과 물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유목 군주나 귀족들은 더 귀한 품종의, 더 많은 사냥매를 운영하고자 노력했다. 왜냐하면 수백마리의 매로 사냥에 나서는 것 자체가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엘리트 스포츠로서 매사냥 풍습은 중국, 아랍-페르시아, 유럽 등 인근 정주 문명지대에도 전파되었다. 중국에서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남북조(南北朝) 시기를 거치면서 북방 초원민족이 대거 북중국 지방에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매사냥 풍습도 함께 수입되었다. 수(隋)·당(唐)제국 시기 매사냥은 귀족들의 중요한 레저활동으로 정착했다.

같은 시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도 매사냥이 활발히 행해졌다. 집안(集安)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삼실총에서는 매사냥하는 인물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고구려는 북방 숙신(肅愼), 즉 만주 지방에 거주하던 주민들로부터 매를 공급받았다. 백제의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이 "매와 말타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나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이 "날마다 매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달리기를 그치지 못했다"는 기록도 매사냥 풍습을 증언한다. 538년 백제의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했을 때 국호를 '매'를 뜻하는 응준(鷹準)으로 개명하는데, 이를 두고 당시 백제가 사냥매를 중시한 증거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실제 일본에 매사냥 풍습을 전파한 것은 백제의 귀족들이었다.

서아시아에서도 매사냥이 활발히 행해졌다. 지금도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같은 곳에는 사냥매를 포함하여 관련 장비를 판매하는 전문 시장이 있을 정도이다. 무슬림들의 매사냥 관습은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우마이야 칼리프조 시기부터 확인된다. 페르시아 궁정의 관습을 아라비아의 유목민족 출신 칼리프들이 수용한 결과였다.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칼리프 야지드1세(Yazid I, 재위 680-63)나 왈리드2세(Walid II, 재위 743-744)는 당시 열렬한 매사냥 애호가로 유명했다. 압바스 칼리프조 시기에는 투르크 맘룩(군사노예)이 대거 유입되면서 투르크계 군인 귀족들과 그들이 세운 정권의 군주들, 즉 술탄(Sultan)들 사이에서 매사냥이 크게 유행했다.

한편 무슬림 세계에서 매사냥이 성행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다. 레반트(Levant) 지역에 도달한 유럽 왕족, 귀족들이 아랍인들과의 접촉 과정에서 매사냥 풍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3세기 대표적인 유럽의 매사냥 관련 저작물인 신성로마제국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의 책 '새들을 이용한 사냥 기술에 대하여(De arte venandi cum avibus)'는 당시 유럽세계에 소개되어 라틴어로 번역된 모아민(Moamyn)으로 불린 아랍인의 저작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랍어 번역본 역시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다.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던 세이커(Saker) 매는 아랍어로 '매'를 뜻하는 사크르(Saqr)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매사냥은 유럽에서 귀족들의 중요한 레저활동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제작된 회화나 직조품(tapestry)에는 유럽 귀족들이 기르던 매와 개를 이끌고 사냥하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16세기에 이르면 유럽 귀족 여성들도 적극 매사냥에 참여하게 된다. 바이에른 지방의 귀족 여성이었던 엘리사벳(Elisabeth Isabeau de Bavaria)에 따르면, "유럽 왕실 여성들 가운데 매사냥을 즐기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한편 13세기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장악한 몽골 제국 치세는 매사냥이 가장 꽃피웠던 시기였다.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는 칭기스칸이 가장 총애하던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즐거움과 쾌락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들이 한결같이 매사냥이라고 대답했던 점에서 몽골 군주 뿐 아니라 귀족들도 매사냥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원사'를 비롯한 중국 측 기록에는 원 세조 쿠빌라이가 얼마나 매사냥을 좋아했는지 잘 드러난다.

이 시기 매사냥 풍속에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송골매'의 전세계적 유행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북극해 인근 지역에서 서식하는 송골매는 사냥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고유의 흰 색 깃털로 인해 유라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영어로 '저팰콘(gyrfalcon)', 러시아어 '크레쳇(krechet)'으로 불리지만 한국어를 포함하여 아랍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만주어 등 아시아 언어에서는 '송쿠르' 혹은 그에 가까운 발음으로 불린다는 점에서 송골매의 문화가 아시아 전역에 공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송골매에 대한 기록은 몽골제국보다 앞선 거란의 요(遼)나라 시기부터 보인다. 거란인들은 매사냥을 즐겨했을 뿐 아니라 일명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불린 송골매를 선호했다. 요나라는 중국 동북지역, 혹은 이른바 만주지역 북동부에 거주하던 말갈-여진족으로부터 해동청을 징발했는데, 과도한 사냥매 공납이 여진족의 반란을 부추겼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당시 역사자료인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 따르면 요나라 황실과 귀족들 사이 요동 바다에서 나는 진주가 보석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이 진주를 얻는 방법이 해동청과 연관 깊었다. 즉 진주 조개를 먹은 백조를 해동청이 사냥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란인들은 만주지방에 거주하던 여진인으로 하여금 아무르강(Amur江)에 위치한 '오국(五國)'으로 불린 부족집단으로부터 해동청을 확보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들 부족집단은 바다 건너 동쪽 지역, 즉 해동(海東)으로부터 해동청을 공급받았다. 여기서 아무르 강 하구에서 바다 건너라고 하면 캄차카(Kamchatka) 반도에 해당한다. 실제 이 곳은 오늘날에도 송골매의 주요 서식지 가운데 한 곳으로 여겨진다.

몽골 제국 시기가 되면 북부 시베리아 지역에서 송골매가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송골매에 대한 기호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당시 예니세이강 유역에 거주하던 키르기즈인들은 칭기스칸을 비롯한 몽골 칸들에게 송골매를 바쳤다. 중국 원대 화가 유관도(劉貫道)가 그린 '원세조출렵도축(元世祖出獵圖軸)'에는 원 세조 쿠빌라이가 자신의 부인 및 측근과 함께 매사냥에 나간 모습을 묘사하는데 왕실 매잡이는 송골매를 대동하고 있다.

몽골제국의 팽창과 함께 송골매의 인기도 유라시아 전역에 퍼져나갔다. 전세계 군주들이 송골매를 애호하게 됨에 따라 유라시아를 횡단 혹은 종단하는 송골매의 거래망이 구축되었다. 북극해에 연한 노르웨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러시아 및 시베리아 지방은 송골매의 주요 공급처로 부상했다. 13-14세기 유럽인들은 이집트의 맘룩조(Mamluk朝)나 몽골 치하 이란의 일칸국(Il-Khan 國)에 송골매를 공급하고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몽골 제국을 이어 중앙아시아를 제패한 티무르 제국에 파견된 스페인과 명나라의 사신들도 송골매를 선물로 전달했다.

14세기 동유럽에서 몽골 금장칸국(金帳汗國)의 대리인으로 부상한 모스크바 공국(훗날의 러시아)는 송골매의 공급과 함께 국가가 발전한 양상을 보인다. 이미 15세기 우랄산맥 서부 페름(Perm)과 페초라(Pechora) 지방을 장악하면서 송골매의 중요한 공급원이 되었다. 1550년경에는 송골매를 매매하는 러시아 상인들의 길드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7세기 초까지 이란 사파비조(Safavid) 귀족 등 거래처에 거액을 받고 송골매를 포함함 각종 사냥매들을 판매하여 부를 쌓았다.

송골매의 인기와 중요성 때문인지 1618년부터 러시아 정부의 전매 조치가 시행되었다. 러시아 정부의 독점 공급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러시아 왕실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불러왔다. 중앙아시아 우즈벡 칸국은 러시아 군주로부터 송골매를 선물로 받는 반대급부로 러시아 포로 및 노예 송환 등 러시아 측에서 원하는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한편 러시아 황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포함한 각국의 군주들에게 송골매를 선물하여 환심을 샀다. 물론 중앙아시아 우즈벡 칸국이나 이란 사파비조 군주들도 송골매를 러시아로부터 받으면 다시 인도 무굴 황제에게 선물하여 비슷한 효과를 노렸다.

이렇게 유라시아 대륙 곳곳의 왕실에서 매사냥이 유행하고 송골매와 같은 희귀종이 거래되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역품이나 외교 사절단의 선물로 유라시아 동서남북을 횡단하는 초장거리 교역의 주요 물품이었다는 점에서 '비단'이나 '차'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매사냥이 중앙유라시아 곳곳에서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필자는 매잡이 재상이라고 하는 독특한 제도의 출현을 소개하고자 한다.

왕실 매잡이가 한 나라의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된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궁장(宮帳) 정치라고 하는 독특한 중앙유라시아 정치 관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앙유라시아 유목제국의 군주들은 많은 경우 화려한 제국 수도의 왕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여름에는 초원에서 유르트(Yurt) 또는 게르(Ger)로 불리던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이러한 군주의 텐트는 특별히 '오르두(Ordu)'라고 불렸는데, 오르두 즉 궁장(宮帳)에서의 생활은 유목군주와 그의 가족을 위한 필수 비서진 및 경호인력이 필수적이었다. 몽골제국에서는 케식(Keshig)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이들 숙위(宿衛)들은 군주의 요리사, 우산 받치는 자, 의복관리자, 화살통 관리자 등 칸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비서의 일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들이 군주의 최측근이다보니 국정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 각지에서 들어온 보고서나 결재 사안은 궁장의 비서격인 이들 숙위들을 통해 구두보고 혹은 결재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목 군주의 숙위 가운데 중요한 직책 중 하나가 사냥매의 관리자였다. 몽골제국 시기 '시바우치(Shibauchi, 한자어로 昔寶赤)'으로 불린 이들은 케식, 즉 숙위의 일원으로 몽골 군주가 매사냥을 나갈 때 근접거리에서 수행했다. 따라서 몽골 군주의 매잡이 '시바우치'는 다른 케식 직책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령 체계를 전달하는 지위를 가졌고, 이로 인해 중국 정주 행정체계상의 재상을 뜻하는 승상(丞相)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 자도 있었다.

유목 군주의 사냥매 사랑과 궁장 정치에 대한 인식은 특히 19세기 중앙아시아에 건설된 토착 왕조들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19세기 중엽 중앙아시아를 석권한 부하라(Bukhara)의 망기트(Manghti) 왕조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칸국들은 쿠쉬베기(Qushbegi) 혹은 코쉬베기(Qoshbegi)라는 독특한 관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훗날 1865년경부터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러시아인들은 이 관직이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점에서 재상 혹은 총리로 묘사했다. 그런데 19세기 초반의 현지 기록에는 쿠쉬베기 혹은 코쉬베기는 군주의 사냥 특히 매사냥을 담당하는 관리로 직무가 명시되어 있었다. 이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매잡이가 어떻게 재상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표시하고 그러한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대로 몽골제국 시기 이래로 중앙유라시아 국가들에서 매사냥이 갖는 중요성과 이를 관리하는 군주의 매잡이가 갖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쿠쉬베기 혹은 코쉬베기가 재상직을 수행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페르시아로 '새'를 뜻하는 '쿠쉬'나 투르크어로 '장막' 이나 '텐트'를 뜻하는 '코쉬'의 장관, 즉 벡(Bek)이라는 뜻의 이 직위는 중앙유라시아 전통의 매사냥 풍습이 갖는 역사적 산물이었다.

매 사냥 풍습은 새로운 각도에서 중앙유라시아 사회를 바라보게 한다. 사냥매 특히 송골매는 각국 왕정에서 매우 선호했고, 무역품이나 외교 사절단의 선물로 유라시아 동서남북을 횡단하는 초장거리 교역의 주요 물품이 되었다. 또한 유목제국 군주의 곁에서 사냥매를 관리하던 매잡이는 군주의 최측근으로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매사냥의 풍습과 그에 따른 사냥매 교역은 유라시아 각 사회의 연결과 함께 북방지역 권력 구조 및 정치 제도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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