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숙인 MBC 사장 "배려 없는 방송으로 올림픽정신 훼손"
'자책골 조롱' 자막 쓴 루마니아에
대사관 통해 사과 서한 보내기로
가디언·CNN 등 전세계 비판 확산
<문화방송>(MBC)이 최근 2020 도쿄올림픽 개회식과 남자 축구 예선전 경기 중계방송에서 몇몇 나라에 대해 부적절한 사진과 자막을 사용한 데 대해 박성제 문화방송 사장이 머리 숙여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박 사장은 26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 경영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세계적인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 지구인의 우정과 연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방송을 했다”며 “신중하지 못한 방송, 참가국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방송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해당 국가 국민들과 실망하신 시청자들께 문화방송 콘텐츠 최고 책임자로서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 사장은 이어 “급하게 1차 경위를 파악해보니 특정 몇몇 제작진을 징계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는, 기본적인 규범 인식과 콘텐츠 검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한 뒤 “철저하게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도 묻겠다. 방송강령과 사규, 내부 심의규정을 강화하고 윤리위원회, 콘텐츠 적정성 심사 시스템도 만들어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또 “스포츠뿐만 아니라 모든 콘텐츠 제작 때 인류 보편적 가치와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권과 성평등 인식을 중요시하는 제작 규범이 체화될 수 있도록 전사적 의식 개선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시청자들의 신뢰를 반드시 회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문화방송은 지난 23일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회식을 생중계하면서 몇몇 나라 선수단 입장 때 부적절한 사진과 자막을 사용해 논란을 일으켰다. 우크라이나 선수단 입장 때 인류 최악의 참사로 일컬어지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사진을, 아이티 선수단 입장 때는 검은 연기를 배경으로 한 시위대 사진과 함께 ‘대통령 암살로 정국은 안갯속’이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엘살바도르 선수단 소개에는 비트코인 사진을 썼는데, 엘살바도르가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채택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 시위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기에 부적절한 사진 사용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논란이 불거지자 문화방송은 24일 입장문을 내어 “개회식에 국가별로 입장하는 선수단을 짧은 시간에 쉽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준비했지만, 당사국에 대한 배려와 고민이 크게 부족했고 검수 과정도 부실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문화방송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 때도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차드) 등 부적절한 자막을 사용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중징계를 받은 바 있다.
이는 외신에도 보도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우크라이나엔 체르노빌, 이탈리아엔 피자: 한국 티브이(TV)가 올림픽 사진에 대해 사과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부적절한 사진과 자막을 지적했다. 미국 뉴스 채널 <시엔엔>(CNN) 인터넷판도 “이탈리아엔 피자, 루마니아엔 드라큘라. 한국 방송사가 올림픽 관련 ‘용납할 수 없는 실수’에 대해 사과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주요하게 다뤘다.
문화방송의 실책은 개회식에만 그치지 않았다. 25일 남자 축구 조별리그 한국과 루마니아 경기를 중계하면서 자책골을 기록한 루마니아의 마리우스 마린 선수를 겨냥해 “고마워요 마린”이라는 자막을 중간광고 때 화면 상단에 띄운 것이다. 이를 두고 상대 선수를 조롱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루마니아 축구 팬들은 에스엔에스(SNS) 등에 “한국 공영방송 엠비시(MBC)가 ‘고마워요 마린, 자책골’이라는 자막으로 마린의 부끄러운 순간을 조롱했다(mocked)”는 글과 해당 자막 사진을 올려 불쾌감을 드러냈다.
박 사장은 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대사관에 사과 서한을 이메일과 인편으로 전달했다”며 “외신에도 사과문과 사과 영상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문화방송의 조직 개편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화방송은 효율성 제고를 이유로 지난 1월 스포츠 프로그램 중계·제작 기능을 자회사인 엠비시(MBC) 플러스로 이관했다. 당시 문화방송 스포츠국 구성원들은 성명서를 통해 “도쿄올림픽을 시작으로 동계올림픽, 아시안게임, 월드컵 등 줄줄이 이어지는 빅이벤트들을 준비조차 못 하는 경영진의 ‘찔러보기’식 접근은 문화방송의 경쟁력 약화를 조장한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스포츠 제작 업무를 담당했던 피디들은 다른 부서로 재배치됐다.
이런 지적에 대해 박 사장은 “조직 개편으로 내부 갈등이 있었고, 본사와 자회사 구성원들이 올림픽 중계를 함께 하는 건 맞다”면서도 “그러나 조직 개편이 문제 원인이라는 분석에는 동의하기 힘들고, 어느 한쪽에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이어 “가장 중요한 원인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올림픽 정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참가국을 존중하지 못한 규범적 인식이 미비했던 점”이라며 “1차 조사는 일단 마쳤고, 올림픽이 끝나는 대로 2차 정밀 조사와 함께 교육·시스템 마련 등 후속 조처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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