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의 목자' 에밀 카폰 신부에 태극무공훈장 수여

김종목 기자 2021. 7. 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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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쟁터의 목자로 불린 에밀 카폰 신부(1916~1951)가 유엔군 참전의 날인 27일 태극무공훈장을 받는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이어 한국전쟁 때도 군종 신부(육군 대위)로 종군해 활동을 벌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붙잡힌 뒤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인 레이먼드 카폰이 27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리는 유엔군 참전의 날 유공 포상 수여식에서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다”고 26일 발표했다.

카폰 신부는 1916년 미국 캔사스주 마리온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940년 세인트루이스의 켄리크 신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미 육군 군종학교에 들어갔다. 2차 대전 때 버마 전선에서 복무했다. 한국전쟁 발발 한달이 안 된 1950년 7월16일 제1기병사단 소속으로 한국에 상륙했다.

북한 인민군의 공격 와중에 낙오자를 구하러 달려갔다. 총탄 속에 장병을 위한 임종 기도를 올렸다. 지프 차량에 흰 보자기를 제대보로 깔고 미사를 올렸다. 1950년 11월1일 평안북도 운산군 부근에서 카폰 신부가 소속된 제8연대 3대대 800여명이 2만여명의 중국 인민군에 공격당한 뒤 고립됐다. 지휘부의 탈출 명령에 카폰 신부는 부상병들을 도와야 한다며 거부했다. 교전 중 중국 인민군 장교도 돌봤다. 이튿날 포로로 붙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도 병사들을 독려했다. 부상자 옷을 대신 빨아주고, 음식을 나눠줬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카폰 신부는 1951년 5월23일 폐렴와 이질로 숨졌다. 그해 5월 마지막으로 부활절 미사를 집전했다.

사람들은 카폰 신부가 압록강 변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2021년 3월 하와이에 있던 무명용사 유해 중 카폰 신부의 유해가 확인됐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카폰 신부의 헌신을 전했다. 그 이야기가 1954년 <종군 신부 카폰 이야기>란 책으로 나왔다. 1956년 당시 신학생이던 고 정진석 추기경이 이 책을 번역해 <종군 신부 카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2003년 당시 바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최상위 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교황청 시성성은 1993년 카폰 신부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했다. 27일 수여식에는 염수정 추기경과 주한 교황청 대사 대리 페르난도 레이스 몬시뇰, 군종교구장 서상범 주교가 참석한다.

에밀 카폰 신부가 1950년 7월 지프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에밀 카폰 신부(미 육군 대위)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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