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 키드먼과 매드맥스, 캥거루에 가려진 사람들과 역사..다니엘 보이드 '보물섬'
[경향신문]
니콜 키드먼, 오페라하우스, 매드맥스, 캥거루…. 호주 하면 대중문화와 유명 건축을 먼저 떠올린다. 장엄한 자연과 풍광도 호주라는 이미지를 구성한다.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자연에 살던 원주민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가려졌다. 서구 문명이 파괴한 역사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 포털 사전은 보통 호주 원주민을 가리키는 명사·형용사 ‘aboriginal’의 반대말을 ‘civilized’(문명화된)로 알린다.
“(잔인하게 파괴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삭제된) 오스트레일리아 토착 문화의 7만5000년이라는 시간을 마주하노라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역사와 철학이 탑재한 단일적 관점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큐레이터 아사드 라자의 말이다. 그는 호주 원주민 작가 다니엘 보이드의 2020년 한국 첫 전시 ‘항명하는 광휘’ 서문에 이런 글을 썼다.
라자의 글에는 보이드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보이드의 친척은 지금 기앙구라 지역에 산다. 원래 ‘야라바’라는 원주민 공동체에 살았다. 유럽인들이 폭력으로 내쫓았다. 보이드의 조상들은 대항하다 추방당했다. 그 뒤 정착지가 기앙구라다. 보이드는 ‘도둑맞은 세대’의 후손이다. 증조부 해리 모스만은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s)다. 호주는 1800년대부터 1970년까지 원주민 아동 강제이주 정책을 실행했다. 원주민 혈통 소멸과 백인 사회 흡수 동화를 노린 정책이다. 부모 중 한 명이 백인인 아이들을 강제 수용했다. 1973년까지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시행했다. 1975년 인종 차별 금지 법률을 제정했다. 2008년에야 케빈 러드 총리가 “자랑스러운 민족과 문화에 가해진 모욕과 탐욕”이란 표현을 쓰며 사과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사과 한마디로 금전 손해를 면하게 됐다는 반응을 냈다. 자신들에겐 ‘침략의 날’인 ‘호주의 날’(1월26일)에 자결권과 토지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시위를 벌이곤 했다.
라자는 “유럽 식민지가 도래하기 이전의 7만5000년을 누르고 그 이후의 250년간의 문화사가 우위를 점”하는 현실에서 이 비교 우위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7만5000년의 역사가 보이드의 작품과 이어진다고 본다.
보이드는 ‘볼록하고 투명한 풀(glue)로 찍은 점’이라는 회화 기법으로 알려졌다. 여러 색으로 밑 그림을 그린 뒤 풀로 투명한 점을 찍는다. 검은색 물감으로 덮고 다시 닦아낸다. 풀로 찍은 점의 색이 다시 드러난다. 점이 곧 렌즈다. 밑바탕에 감춰진 색을 이 렌즈로 들여다본다는 걸 뜻한다. 백인이 감추거나, 재현한 이미지의 이면을 본다는 취지의 기법이다. 그 기법이 전하려는 이야기는 원주민의 정체성, 추방과 배제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는 “내 작품은 모두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선조들의 존재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원주민 역사와 작가의 취지를 알면, 독특한 기법 너머 작품의 의미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다. ‘Untitled(GGASOLIWPS)(알파벳 대문자는 작가의 암호·코드)’는 증조부 모스만이 호주의 산호초 지대인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 탐사에 참여했을 때 찍은 사진을 차용해 만든 작품이다. 백인들은 당시 원주민들을 탐사에 강제 동원했다. 바누아투 펜테코스트섬 풍경을 그린 게 ‘Untitled(THLUTTCS)’다. 여기 살던 고조부가 퀸즐랜드 사탕수수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했다. 친누나가 전통 춤 공연을 준비 중인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만든 작품이 ‘Untitled(TDHFTC)’이다.
한국에서 개최한 두 번째 개인전(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제목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동명 소설(1883) 제목을 딴 ‘보물섬’이다. 보이드는 이 소설이 대서양과 태평양의 여러 원주민에 고정 관념을 만들었다고 본다. 작가는 작품 활동 초기 호주 식민지 영웅인 탐험가 제임스 쿡과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를 ‘해적’으로 묘사한 연작을 선보였다. ‘Untitled(TIM)’는 소설 속 보물섬 지도를 그린 것이다. <바운티호의 반란>이란 여러 편의 영화로도 유명한 바운티호는 노예들에게 먹일 빵나무를 구하러 갔다. 이 배를 묘사한 게 ‘Untitled(FFITFFF)’이다. 바운티호 선장 윌리엄 블라이는 제임스 쿡의 수석항해사였다. 1962년 작 <바운티호의 반란> 이미지 일부를 차용한 ‘Untitled (POMOTB)’도 개인전에 냈다.
보이드의 작품은 직설적이지 않다. 강제노동과 학살, 해적들의 노략질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은유와 차용의 방식은 기법과 이어진다. 보이드는 각각의 ‘풀로 찍은 점’을 ‘렌즈’라고 말한다. 점점이 캔버스에 박힌 렌즈는 “하나의 집단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지각하는 방식 즉 복수성과 다양성”이다. 관람객이 인류의 일원으로서 원주민과 역사에 관해 더 잘 이해하길 바라는 말 같다. 한국에서 처음 공개하는 ‘RIVERS’는 작가의 사유와 문제의식의 공간이 우주로 확장한 것을 보여준다. 수많은 움직이는 점들로 이루어진 영상 사운드 작품은 우주와 나, 사람들과 시공간 간 관계를 묻는 작품이라고 그는 말한다. 전시는 8월1일까지. 무료.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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