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의 화원에 노니는 한 마리 나비이고자' 했던 비평가
눌인 김환태(金煥泰, 1909~1944).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문학비평가로 순수비평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남대천을 거쳐 금강 수계를 이루는 무주의 반딧불전통공예문화촌 내에 ‘김환태문학관’이 있다. 같은 건물 맞은편 공간에는 ‘최북 미술관’이 나란히 자리한다.
최북(崔北, 1712~1786)은 산수화와 메추리 그림에 뛰어났던 조선 숙종~영조 때 화단의 거장이다. <송음관폭도>·<미법산수도> 등 많은 걸작을 남겼으며, 예인다운 기행으로 더 유명하다. 금강산 구룡연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마땅하다”고 소리치면서 갑자기 못에 투신한 일이나, 세도가가 자신의 붓 솜씨를 트집 잡자 분을 내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는 일화는 기인의 풍모를 보여준다.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했으며, 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점을 팔아 술을 사 마시고는 겨울밤에 눈구덩이에서 동사했다. 무주가 낳은 문학과 미술의 거장들, 김환태와 최북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이곳 일대는 매년 반딧불 축제가 열리는 청정지역이다. 올해는 8월 28일부터 9일간 열리는데 코로나 여파로 프로그램을 대폭 축소하여 간소하게 개최한다고 한다.
김환태는 무주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1922년 13세에 전주고보에 입학했다. 이듬해 일본인 교사를 쫓아내려는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자퇴한 뒤 1927년 서울 보성고보를 졸업했다. 이듬해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예과에 입학, 수료했고 1934년 규슈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시절 시인 정지용과 친교를 맺었고, 졸업논문으로 ‘문예비평가로서의 매슈 아놀드와 월터 페이터’를 남겼다.
귀국 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4년 번역문 <예술과 과학과 미>를 발표한데 이어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비평을 시작했다. 1936년에 ‘구인회(九人會)’에 입회, 후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문학파 작가들과 교유했다. 김환태는 그해 6월 무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박봉자를 아내로 맞이한다. 혼례에는 도산(島山) 안창호선생도 참석했는데, 박봉자는 정지용 등과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한 용아 박용철의 누이동생이다.
박봉자는 이화여전을 나와 잡지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던 재원이었다. 특히 <여성>지에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제목으로 소설가 김유정과 칼럼을 함께 발표한 인연으로 김유정으로부터 30여 통의 열애편지를 받기도 했다. 결국 박봉자가 김환태와 혼례를 올림으로써 김유정이 깊이 좌절했던 편지글들이 남아있다. 김환태는 그해 일본 유학시절 인연을 맺은 안창호 선생과의 교류를 이어가다가 사상문제로 동대문경찰서에 1개월 수감되기도 했다.
‘나는 상징의 화원에 노니는 한 마리 나비이고자 한다. 아폴로의 아이들이 가까스로 가꾸어 형형색색으로 곱게 피워놓은 꽃송이를 찾아 그 미에 흠뻑 취하면 족하다. 그러나 그때의 꿈이 한껏 아름다웠을 때에는 사라지기 쉬운 그 꿈을 말의 실마리로 얽어놓으려는 안타까운 욕망을 가진다. 그리하여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소위 나의 비평이다. 따라서 나는 작가를 지도한다든지, 창작방법을 가르쳐준다든가 하는 엄청난 생각을 감히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평의 기준이니 방법이니 하는 것도 또한 나에게는 소용되지 않는다.’ 그의 평론 <평단 전망>의 한 부분이다.
명신중학교에서 2년간의 교편을 잡은 뒤 1940년 서울 무학여고로 자리를 옮겼다. 그 무렵은 일제의 창씨개명, 조선·동아일보의 폐간, ‘황국신민화’ 강요 등이 극심하던 때라 문사들은 붓을 꺾어 저항하거나 변절의 길을 걷기도 했다. 김환태는 그해 4월 이후 절필했다. 반민족적인 문학을 하느니 차라리 고등고시를 통해 억울한 민중들을 돕자는 생각에 낮에는 교단에 서고 밤에는 고시준비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후 과로가 겹쳐 폐질환을 앓게 되고 1943년 병이 악화되자 사직하고 고향 무주로 돌아온다. 그는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서른다섯을 일기로 짧은 생을 마쳤다.
문학관은 2, 3층에 걸쳐 세미나실과 다목적 영상관, 눌인 전시관, 휴게시설 등을 두루 갖추고, 그의 비평 선집과 유물과 유산 등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문예비평이란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해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정신의 노력입니다. 따라서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표출하여야 합니다.’ 문학관에는 그가 남긴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라는 글의 부분이 걸려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순수문학의 이론체계를 정립하고 계급주의 등으로 경직된 문단에 순수 비평을 싹을 틔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카프(KAPF)의 공리주의적인 문학을 반대하고 비평과 문학의 독립성·순수성을 주장했다.
이어령은 추모의 글에서 “금과 구리는 시간이 지나야 안다. 당장 그 당시의 문단에 호소력을 가졌던 많은 비평가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영영 그 소식조차 모를 때, 김환태는 남아서 우리와 함께 숨 쉰다. …불행한 시대에도 행복한 글 읽기를 한 사람들, 그래서 오히려 불행을 말하는 사람보다 더 치열한 정신을 갖고 문학에 도전한 사람들, 그들의 글을 읽으면 왜 김환태가 죽은 비평가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내 마음의 이니스프리에는 소가 산다. 이리하여 네거리 아스팔트 위에서나 철근 빌딩 밑에서 바위그림자와 같은 이니스프리의 향수에 엄습될 때면 나는 내 마음 심지에 ‘못 가장자리를 핥는 잔물결 소리’외에, 또 골짝을 울리는 해설픈 소 울음을 듣는다. 소가 사는 내 이니스프리의 경계는 이렇다. …이듬해 첫봄에 소가 새끼를 낳았다. 나는 동생을 보던 날처럼 기뻐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이 시절이 나의 가장 행복하던 시절, 내 마음의 고향이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날 때면 그 시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소를 생각한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소가 그립다.’ 정지용의 시가 떠오르는 이 아름다운 산문은 김환태가 1937년 <조광>에 발표했던 <내 소년시절과 소>의 부분이다. ‘상징의 화원에 노니는 한 마리 나비이고자’ 했던 눌인 김환태. 1986년 덕유산 국립공원에 그의 문학비가 건립되었고, 1989년 그의 평론문학상이 제정되었고, 2012년 그의 문학관이 건립되었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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