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지식카페>탄압받던 사상가·과학자 몰려..유럽의 모든 금서 허락됐던 자유의 땅

기자 2021. 7. 2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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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모든 금서가 출판되고 예술이 꽃피었던 암스테르담. 역사학자 러셀 쇼토는 암스테르담을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이라고 했다. 사진은 암스테르담 정경.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⑥ ‘自由의 도시’ 암스테르담

‘낮은 땅’이란 뜻의 네덜란드는 ‘수평성’이 도시운영 원리… 위계 없고 온갖 인종·종교·사상에 열려있어

광학·천문학·예술 눈부신 성과… 1602년 세계 첫 주식회사 설립해 자본주의 발명했지만 ‘탐욕적 투자’로 몰락

암스테르담에는 수직성이 부재한다. 국명 자체가 ‘낮은 땅의 나라’인 네덜란드는 국토 전체가 평원이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321m, 인왕산 높이다. ‘산의 나라’인 한국과 달리, 네덜란드는 ‘물의 나라’다. 암스테르담엔 길이 99.2㎞의 운하, 약 90곳의 섬, 1500량의 다리가 있다.

암스테르담은 수평의 땅을 보면서 자란 시민들의 심상 지리가 구현된 곳이다. 권력의 위세를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축물 없이, 시민들이 편하게 규칙적·계획적으로 개발됐다. 수평성이 도시의 운영 원리다. 암스테르담은 시민 간에도, 종교 간에도 위계가 없는 평등의 땅이요, 온갖 인종과 종교와 사상에 열려 있는 관용의 대지이며, 금지되지 않은 것은 모두 허용되는 자유의 천국이다. 마리화나도, 매매춘도, 동성애도, 심지어 죽을 자유, 즉 안락사도 막지 않는다. 역사학자 러셀 쇼토는 암스테르담을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이라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의 자유를 이용해 현대의 뒤틀린 내면을 들여다본 작품이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이다. 몰리라는 한 여자를 사랑한 네 남자가 있다. 그중 둘은 저명한 작곡가 클라이브와 일간지 편집국장 버넌. 몰리가 죽은 지 얼마 후 그녀가 남긴 외교장관 가머니의 여장 사진이 발견된다. 보도 여부를 둘러싼 논쟁 끝에 클라이브는 버넌의 속물성을 비난한다. 클라이브도 완벽하진 않다. 영감을 얻으려 등산을 갔다가 그는 숲에서 위협받는 여자를 외면한다. 악상을 방해받지 않고 싶어서다. 이번엔 버넌의 비난이 도를 넘는다.

그들이 선택한 여행지가 암스테르담. “의사 면허 있는 몰지각한 작자들이 짐 되는 늙은 부모를 없애 주는 합법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몰리의 장례식에서 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이 도시로 데려갈 것을 서로 약속했다. 추한 꼴 더 보기 전에 상대를 없애려는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위선자인가. 한 꺼풀 피부 아래엔 살인마를 감추고 있다. 인간은 얼마나 약한가. 상대를 헤아리지 않는 무관용은 평생 친구를 삽시간에 원수로 만들고, ‘죽을 자유’를 ‘죽일 자유’로 변질시킨다. 암스테르담의 역사는 반대로 자유와 관용이 함께할 때만 번영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암스테르담이 생긴 것은 1100년경이다. 암스텔강 하류의 늪지를 개간하고 제방을 쌓고 바다를 막아 마을을 지었다. 발전은 더뎠다. 1450년에도 인구 5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당대 어느 곳보다 자유로웠다. 하늘이 준 땅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땅이었기 때문이다.

봉건제가 여기선 잘 작동하지 않았다. 신앙을 빌미로 한 귀족과 교회의 갑질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눠 가진 간척지에서 시민들이 농사짓고 장사하는 자치의 전통이 우선했다. 물과 싸우려면 협동과 합의는 필수였으나, 강압과 복종은 통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러셀 쇼토에 따르면, “16세기 네덜란드인은 자신 외에 누구도 섬기지 않았다.”

자유를 위협한 것은 신성로마제국이었다. 1568년 ‘나무의 땅’ 홀란드가 이에 맞서 독립을 선언했다. ‘지갑을 통한 고문’(세금)이 원인이었다. 펠리페 2세 황제가 영국·프랑스·튀르크 등과 전쟁을 치르려고 잘사는 네덜란드인 지갑을 노린 것이다. 시인 요스트 판덴 폰덜은 ‘홀란드의 사자에게’에서 호소한다. “잔혹한 물 늑대가 심장을 물어뜯고/ 너를 굴복시키려 하는구나./ 대지의 사자여, 일어나라, 잠 깨어 포효하라!/ 켄네메르란트 토탄지 사람들도, 라인란트의 영주들도,/ 암스테르담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사자를 구하라.” 사자는 네덜란드의 상징이다. 이에 맞서는 괴물 ‘물 늑대’는 오랫동안 물과 싸워왔던 이 땅의 역사를 암시한다. ‘숲의 사람’이 사자처럼 일어서자 1578년 암스테르담이 합류하면서 저지대의 ‘물의 사람’도 투쟁에 돌입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할 때까지 많은 시민이 자유에 목숨을 바쳤다.

독립을 주도한 이들은 상인계급, 종교로는 칼뱅파 신도였다. 자유를 존중하고 근면을 강조하며 상업을 장려하는 교리가 부르주아들 입맛에 맞았다. 그러나 신의 뜻을 구현한답시고 아이까지 사형에 처했던 ‘제네바의 악마’ 칼뱅과 달리, 암스테르담 칼뱅파는 다른 종교들에 관용을 베풀고 이주자에게 문을 열었다. 모든 우상을 부정하고 스스로 학습한 진리만 인정했던 에라스뮈스의 후예답게 어떠한 사상도 마음껏 논하게 내버려 뒀다.

관용의 대가는 달콤했다. 탄압과 억압을 피해 정치적·경제적 난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왔다. 다양하고 풍부한 인적 자본은 변혁의 용광로요, 창조성의 원천이다. 유럽 각국의 사상가, 과학자, 예술가 등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운하를 느리게 떠도는 너벅선에서, 커피숍에서, 서점에서 열렬한 토론을 벌였다. “상점 주인조차 교수처럼 보이고, 청소부조차 재즈 음악가처럼 보”(이언 매큐언)이는 도시다웠다. 출판업자들도 속속 합류했다.

암스테르담에선 유럽의 모든 금서가 출판됐다. 홉스도, 스피노자도, 데카르트도, 로크도, 갈릴레오도, 코페르니쿠스도 여기서만 책을 낼 수 있었다. 데카르트는 감탄했다. “다른 어느 곳에서 이토록 완벽한 자유를 느낄 수 있겠는가?” 페이메이르의 그림 ‘천문학자’가 드러내듯, 종교가 목청을 낮추자 과학이 일어섰다. 현미경의 레이우엔훅, 진자시계의 하위헌스 등 광학, 천문학 등의 성과가 눈부셨다.

예술도 꽃피었다. 렘브란트가 중심에 있었다. 이 세속주의 화가는 정물화, 풍속화 등을 통해 시민 일상을 화폭에 옮겼다. 건물 외관은 비슷했으나 집 내부는 개성이 넘쳤다. 시민들은 취향에 맞춰 가구와 도자기, 그림과 판화를 구해 집을 장식했다. 소박하나 안락하고 잘 꾸며진 집, 즉 사생활 영역이 막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진짜 혁신은 자본주의 체제의 발명이었다. 시장과 자본주의는 관련이 깊지 않다. 시장은 어느 체제에나 있다.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하는 것은 투자를 통해 누구나 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시장의 구축이다. 1602년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에 돈을 투자해 세계 최초의 상장 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발명했다.

정부로부터 향신료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은 VOC는 군대를 보유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외국과 조약을 맺고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필요하면 침략자나 약탈자로 변신하는 군대 기업 겸 합법 해적이었다. VOC는 1641년 믈라카를 빼앗아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인도네시아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전용 무역항을 열기도 했다. 피 묻은 돈이었으나 투자자로선 대성공이었다.

VOC의 탄생에서 주목할 점은 일반 시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이 크고 위험한 회사의 자본금 60%를 조달한 일이다. 이로부터 앞날에 대한 확률적 예측을 통해서 돈이 오가는 세계가 출현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힘은 자본주의적 인간의 핵심 역량이다. 눈에 보이는 현물보다 기대와 예감을 더 가치 있게 보는 거래 장치가 곧 나타났다. 주식 매매, 선물거래, 공매도, 복권 등이다. 주식 체제는 이 도시 시민을, 나아가 온 인간을 투기꾼으로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이 도시에선 나 말고는 누구나 장사를 한다.”

역사 작가 벤 윌슨은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실용적 기풍이 자유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바다와 싸우면서 길렀던 실용 정신이 수익에 집중하는 혁신적·비정통적 사고를 퍼뜨리고, 돈벌이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치워 버렸다. 스페인이 보여 주듯, 종교 박해와 사상 탄압은 거래에 불안정성을 가져와 번영의 소진과 몰락을 가져온다. 자유 토론과 사상 개방은 시도를 촉진하고 정보 순환을 가속해 사업 혁신에 도움이 된다. 영리한 암스테르담은 관용을 택했다.

1620년부터 1700년까지가 암스테르담의 ‘황금시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도시를 몰락시킨 것 역시 ‘투자’였다. 튤립 버블이 보여 주듯, 설탕, 커피, 향신료 등을 이용해 인간 전체가 투기에 뛰어든 탐욕이 오래갈 리 없다.

“탐욕이 커질수록 진실을 직시하는 힘은 줄어든다.” 네덜란드 소설가 코니 팔멘의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에 나오는 말이다. 역사의 교훈이다. 탐욕은 거품을 낳고, 거품은 붕괴한다. 품질 향상을 외면하고 돈놀이에만 몰두하자 네덜란드 군함은 영국과 프랑스 함대를 이길 수 없었다. “프랑스나 영국 배에는 구멍 하나 날 만한 포탄에도 네덜란드 배는 관통된다.” 몰락이 왔다. 신흥강국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암스테르담의 우아한 운하는, 카뮈가 ‘전락’에서 묘사한 것처럼 “구정물에 가까운 지옥의 둘레”로 퇴락해 버렸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튤립 버블 :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열풍을 말한다. 터키에서 들여온 튤립이 아름다움으로 인기를 끌자, 투자 열풍이 불면서 가격이 폭등해 ‘미래의 꽃’인 구근 한 뿌리 가격이 집 한 채 값을 넘어섰다. 1637년 2월, 갑자기 거품이 꺼졌다. 전 재산을 쏟아 넣고 어음을 받은 이들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국가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 역사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이다.

황금시대 : VOC는 투자 위험이 컸으므로 안정성을 위해서는 독점이 필수였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낳았다. 강하고 큰 선박으로 물류 흐름을 차지하고, 자원 많은 땅을 점령해 원자재를 갈취하고 현지 노동력을 착취하는 시대가 열렸다. 독점은 경쟁을 줄였으나, 분쟁을 증가시켰다. 규모도 점차 커졌다. 귀결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 멈추지 않는 지하드였다. 황금시대는 온 세상 황금을 약탈해 제국주의자들만 배 불린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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