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간첩에 녹아난 '비운의 끝판왕'..개로왕의 가짜묘가 무령왕릉 위에?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2021. 7. 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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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제강점기부터 쭉 ‘송산리고분군’이라 했는데요. 요 며칠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사적)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있죠. 그러나 이 기사에서는 아직 익숙한 명칭인 송산리고분군이라 하겠습니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가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를 마감하고, 쫓겨 내려온 이후 웅진시대(475~538)에 조성된 왕릉묘역입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송산리고분군)의 맨 윗부분에 정체불명의 3단 석축유구가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의 침공 때(475년) 전사한 개로왕을 위한 가묘(혹은 허묘)일 가능성과, 개로왕 등 한성백제 시대 임금들을 기리기 위한 제사유구(종묘)일 가능성 등이 제기되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정체불명의 유구

일제강점기 자료에는 이곳에 29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한 것으로 표시했는데요. 최근에 지하물리탐사 등의 첨단기법으로 분석해보니 자그만치 40여기의 백제고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죠.

웅진시대의 임금이라면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로 천도) 등 5명입니다. 그 중 유일하게 주인공이 확인된 고분이 올해 발굴 50주년을 맞은 무령왕릉이죠. 다른 고분들은 웅진백제를 다스린 임금 네 분과 그분들의 왕족 무덤들로 추정되죠.

그런데요.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과 왕릉원)의 정상부근에는 무덤(적석총)인듯 하지만 무덤이 아닌 것 같은 시설물의 흔적이 보입니다. 이 시설물의 정체를 두고 30년 이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1988년 발굴 조사 결과는 돌로 쌓은 3단 구조물이 서울 석촌동 2·4호 적석총과 비슷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무엇보다 웅진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인 송산리 고분군의 맨 위쪽에 자리잡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웅진 천도 후 가장 먼저 조성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이 시설물은 한성백제 시대 서울 석촌동 적석총의 전통을 이은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매장주체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이다” 하고 단정할 수는 없었죠.

최초 발굴 때는 도굴구덩이로 추정된 3단 석축구조물의 한가운데에서 최근 토광묘인듯한 정연한 유구가 확인됐다. 그 안에서는 이미 삼족토기와 관에서 쓰였을 수도 있는 쇠못도 확인된 바 있다. 여전히 이 유구가 개로왕을 모신 가묘(혹은 허묘)일 가능성이 남아있는 이유이다.


■개로왕의 가묘인가 제사유구인가

그렇지만 당시 발굴자는 한성백제 마지막 임금이자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개로왕(재위 455~475)를 위한 가묘, 혹은 허묘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확증자료가 없었으니 그럴듯한 추정일 뿐이었죠.

이후 이 시설을 석탑지로 보는 견해와, 제사유적으로 판단하는 주장들이 계속 나왔는데요.

‘제사유적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동성왕조’에 “489년(동성왕 11), 임금이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내세웠는데요. 요즘에는 제사 중에서도 조상을 기리기 위한 종묘일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석축 시설의 남쪽에서 5.5m 간격으로 묶음을 이루는 기둥구멍이 확인됐는데요. 이것이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웅진시대의 임금들이 한성에서 비명에 간 개로왕의 넋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근초고왕(346~375) 등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룬 조상들도 제사의 대상이 됐겠죠. 국력이 쪼그라든 웅진 시대 임금들에게는 한성시대의 영화를 떠올리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의미도 있었을 거구요.

그러나 이 기둥구멍 시설이 정말 제단인지, 아니면 무덤 조성 전에 일종의 상량식이나 기공식을 거행한 흔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최근의 발굴 결과 유구의 한가운데에서 토광묘처럼 정연하게 판 구덩이가 나타났는데요. 하지만 이 구덩이가 주인공을 묻은 매장주체부인지, 아니면 제사 때 쓰인 물품들을 매납한 곳인지는 여전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아직 이곳이 제단인지, 진짜 무덤인지 100% 단정할 수 없겠네요.

3단 석축물이 무덤(적석총)이 아니라 제사를 지냈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석축구조물 앞쪽에 제단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는 기둥 구멍이 확인됐다.|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비운의 끝판왕

그런데 무덤이든, 제사유구든 딱 한 분, 개로왕(455~475)이라는 분이 빠짐없이 소환되네요.

따지고보면 고구려·백제·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에 무슨 민족의 개념이 있었겠습니까.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이었죠. 따지고보면 전쟁 중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임금들도 심심찮게 있었죠.

고구려 고국원왕(331~371)은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371년)에서 필사적인 항전을 벌이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죠. 그 뿐인가요.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540~576)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자(553년) 복수하러 출전했다가(554년) 관산성(옥천)에서 신라군의 복병을 만나 목이 잘리고 말죠. 신라도 373년 뒤인 927년 경애왕(924~927)이 후백제 견훤왕(892~935)의 공격을 받아 죽고 맙니다.

송산리 고분군의 맨 위쪽에서 확인된 3단 석축구조물을 복원해본 모습. 전성기인 한성백제시대 왕릉인 서울 석촌동 고분의 적석총과 흡사하다.|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그러나 개로왕의 죽음처럼 드라마틱한 역사속 장면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볼까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연 나라는 바로 백제였습니다. 중국 사서인 <송서>와 <양서>, 그리고 6세기 때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의 용모를 묘사한 <양직공도> 등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는 기사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이 기록을 믿지 않은 이들도 있죠.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구요.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태사)에게 올린 편지를 봅시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오와 월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삼국사기> ‘열전·최치원’)

고구려와 백제 국력이 중국 본토인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 북으로는 연·제·노나라를 괴롭힐 정도였다는 기록했잖습니까.

한성백제 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 왕릉으로 알려진 서울 석촌동 2호(위 사진)와 4호분(아래 사진)의 복원 모습. 송산리 고분군의 맨 위쪽에 조성된 3단 석축구조물과 흡사하다.

■바둑 간첩의 세치혀에 놀아나다

그러나 백제는 396년(아신왕 5)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2)의 대대적인 침공에 손을 들고 말죠.

<광개토대왕 비문>은 “백제왕이 백성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고 항복했고, ‘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다짐한 뒤 58성 700촌을 내주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권토중래를 노리던 백제는 472년(개로왕 18) 중국 북위에 “지금이 (북위와 백제가) 손잡고 고구려를 멸망할 절호의 기회”라면서 동맹을 제안합니다. 이때 개로왕은 ‘승냥이와 이리(시랑·豺狼)’, ‘큰 뱀(장사·長蛇)’, ‘추악한 무리(추류·醜流)’, ‘애송이(소수·小竪)’와 같은 표현으로 고구려를 증오합니다.

<양직공도>와 <송서> <양서> 등 중국측 문헌에는 “백제가 중국 요서지방을 경략했다”는 내용이 줄기차게 나온다.


그러나 북위는 어느덧 강국이 된 고구려의 눈치를 보게되죠. 결국 북위는 끝내 백제 개로왕의 동맹제의를 거부하고 맙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423~491)은 개로왕의 숨통을 끊을 계책을 구합니다. 극비리에 백제를 도모할 첩자를 구하죠. 이때 승려 도림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고 손을 듭니다.

도림에게는 한가지 특기가 있었습니다. ‘국수(國手)’라는 명성을 얻을만한 바둑의 최고수였습니다. 뭐 지금의 신진서·박정환 9단 급이었겠죠.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과 장기를 엄청 좋아한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습니다,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백제에 투항한 뒤 개로왕에게 접근합니다.

“신이 바둑을 한 수 지도할까 합니다.”

설마하며 도림을 받아들인 개로왕이 시험해보니 과연 국수였습니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고,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합니다.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이 마각을 드러내며 귀속말을 합니다.

사진은 MBC ‘신비한 세계-서프라이즈’에서 고구려가 파견한 간첩 도림(손윤상 분)이 개로왕(박재현 분)을 바둑으로 접근하는 장면이다.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실력을 시험한 뒤 “우리가 왜 이리 늦게 만났나”고 한탄한다.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실력에 흠뻑 빠진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나라(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성곽과 궁실이 엉망입니다. 또 선왕의 해골이 들판에 가매장돼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백성들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선왕’은 아마도 정변으로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개로왕의 아버지(비유왕·427~455)을 가리키는 것 같아요. 선왕의 유해가 가매장되어 있다면 그것은 크나큰 불효겠죠. 개로왕의 마음이 흔들렸을 겁니다.

결국 개로왕은 도림의 ‘세치혀’에 말립니다. <삼국사기>는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도탄에 빠졌다”고 기록합니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합니다. 장수왕은 “이제 됐다”고 뛸 듯이 기뻐합니다. 장수왕은 백제에서 죄를 짓고 망명한 걸루와 만년에게 백제 침공군의 선봉장을 맡깁니다.

한성 백제의 도읍인 풍납토성의 조성모습을 재현해놓은 장면. 풍납토성은 기원전후부터 수차례 수축했다. <삼국사기>는 “도림의 꾐에 빠진 개로왕이 백성들을 징발해서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궁실과 누각, 사대 등을 조성했다”고 기록했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배신자에게 죽임당한 임금

드디어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섭니다. 뒤늦게 도림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개로왕이 땅이 꺼지도록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내가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그러면서 아들(문주왕)에게 신신당부합니다.

“난 당연히 죽어야겠지만, 너는 죽어서는 안된다. 난리를 피해 왕통을 잇도록 해라.”

급기야 7일간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북성(풍납토성)은 함락됩니다. 개로왕은 급히 남성(몽촌토성)으로 피했지만 고구려군에 붙잡혀 참담한 최후를 맞고 맙니다.

개로왕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합니다.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 등은 도망간 개로왕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세 번 절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은 뒤 죄를 책망했다. 그런 뒤 왕을 아차성 밑에 결박하여 끌고 와 살해했다.”

왕을 욕보이고 죽인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인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이들이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1075~1151)은 백제를 배신한 걸루와 만년을 비난합니다.

“걸루·만년이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도망친 뒤에 적병을 인도하여 한때 섬기던 임금을 결박하여 죽이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도다.”(<삼국사기> ‘개로왕조’)

개로왕은 475년,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한성을 빼앗기고 그 자신도 목숨을 잃는다.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걸루와 만년이 개로왕을 모욕하고 죽였다.(왼쪽 사진은 KBS ‘한국사신’) 개로왕은 아차산 밑(오른쪽 사진)까지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잊어버린 ‘검이불루 화이불치’

한편 한성을 탈출한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신라가 내어준 원군 1만명을 이끌고 한성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이미 성은 함락된 뒤였고, 고구려군도 철수한 뒤였습니다. 궁실도 모두 파괴된 뒤였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문주왕은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남쪽 땅 웅진(공주)으로 떠납니다. 백제의 절정기를 이끈 한성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죠.

저는 개로왕의 기사를 읽으면 안타깝습니다. 만약 백제 시조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7)이 기원전 4년 새 궁궐을 지을 때의 정신을 잊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패망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겁니다.

“새 궁실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삼국사기)

이것이 백제의 ‘검이불루 화이불치’ 정신이었는데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웅진 백제 시대 임금들이 묻힌 ‘옛 송산리 고분’(무령왕릉과 왕릉원)의 맨 위쪽에 조성된 석축구조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개로왕을 위한 가묘(혹은 허묘)든, 아니면 개로왕을 비롯한 한성시대 임금들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든….

678년이나 이어진 백제의 전성기는 웅진백제(475~538)도, 사비백제(538~669)도 아닌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의 493년이라는 것을…. 이 석축은 비명에 간 선왕(개로왕)의 명복을 빌고, 한성백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염원이 담긴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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