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을 키우며 "난생 처음 직업을 가진 것처럼 자홀감" 느껴
1955년부터 죽기까지
13년간 구수동 살며
양계 통해 노동 실감
생활의 안정이 자칫
정신 치열성 약화시킬라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중용의 길' 부단히 노력
1955년 6월 김수영 일가는 서울 성북동에서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를 했다. 1968년 집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기까지 그 집에서 13년을 살았다. 지난 6월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는 문학기행에 참여해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선생님에게서 구수동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집터도 함께 둘러보았는데, 집의 구조를 자세히 설명해주신 덕분에 당시의 생활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구수동 집에서 김수영은 전쟁과 포로수용소 생활로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비로소 안착할 수 있었다. 1960년대 4·19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로 이어진 역사의 격랑을 떠올려볼 때, 그 직전의 몇 년은 김수영에게 폭풍 전야의 휴식기와도 같았다.
이 시기에 김수영은 주로 번역과 양계로 생업을 이어갔다. 그의 아내가 병아리 11마리를 사와서 시작한 양계는 그 규모가 꽤 커져서 750마리까지 늘었고, 채소밭은 1000평 정도 되었다고 한다. ‘양계(養鷄) 변명’이라는 산문에 썼듯이 김수영은 아내와 양계를 하면서 “되잖은 원고벌이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하”고, “난생 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것 같은 자홀감(自惚感)을” 느꼈다. 사료 파동이 난 후에는 번역료마저 사료값으로 쏟아붓다가 양계를 접어야 했지만,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던 그가 양계를 통해 노동의 실감을 느끼게 된 것은 새로운 시적 경험이라고 할 만하다.
1950년대만 해도 구수동은 온통 채소밭이어서 시골의 정취를 누릴 수 있었고, 그 무렵 쓴 시들에는 노동의 활기와 생활의 체취가 묻어난다. 가족들과도 서로 애틋하게 여기며 얼크러진 관계를 회복해가는 모습이 보인다. “보석 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 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 냄새가 술 취한/ 내 이마에 신약(神藥)처럼 생긋하다”(‘초봄의 뜰 안에’)는 대목은 그 시절의 정경을 한눈에 보여준다. 다음 연에는 “옷을 벗어 놓은 나의 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라는 구절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느끼는 ‘한기’(寒氣)는 한겨울의 추위가 아니라 정신의 얼음이 녹아가는 ‘해빙’의 감각에 가깝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여름 아침’에서 ‘나’는 검게 탄 아내의 얼굴을 보며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밭을 고르고 있는 이웃들도 식구처럼 여기게 된 ‘나’는 그들을 향해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고 말한다. ‘숙련’이나 ‘구별’을 모르는 영혼의 노동이야말로 숭고하다는 이 말은 어쩌면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한다는 대목에서 시인으로서의 고뇌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가는 ‘나’ 역시 “자비로운 하늘”이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속에 사람들과 함께 있다.
이 무렵 쓴 시들에는 ‘생활’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생활’에 대한 김수영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생활에 골몰할수록 느슨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는 긴장감 또한 강해진다. ‘이 일 저 일’이라는 산문에 쓴 것처럼, 그는 매문뿐 아니라 “매문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하면서 매문을” 하는 것까지도 경계했다. “구공탄 중독보다도 나의 정신 속에 얼마만큼 구공탄 가스가 스며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름의 파수병’에서는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외양만이라도 남들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반문한다. 아예 ‘생활’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도 있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치는 그에게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였다.
반면 ‘여름 뜰’에서는 “질서와 무질서와의 사이에/ 움직이는 나의 생활은/ 섧지가 않아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라며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김수영의 시나 산문에는 서로 상반된 구절이나 반어적 표현들이 자주 보인다. 그의 시에 나타난 설움이나 비애 역시 매우 복합적인 심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라는 소리가 비 오듯 들려오는 여름 뜰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 있는/ 나의 표정에는 무엇인지 우스웁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마저 섞여 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김수영은 생활의 운산과 무위의 글쓰기 사이에서,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합리와 비합리 사이에서,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수없이 번민하며 내적 싸움을 이어갔다.
시인에게 생활의 안정이란 글쓰기의 최소조건인 동시에 정신의 치열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적(敵)이 되기도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의 화자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러한 자신을 보며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라고 탄식한다. 마치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돌처럼, 세상이라는 더러운 물에 빠지지도 않고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초월하지도 않는 것, 생활이 뮤즈를 너무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김수영이 생활에서 얻어낸 균형감각 또는 속도감각이 아닐까 싶다. 생활과 예술 사이에 이 중용(中庸)의 길을 내기 위해 그는 부단히도 자신 속의 뮤즈에게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출 필요가 있다고 속삭였을 것이다.
‘물부리’나 ‘밀물’ 등의 산문에서는 분노와 자학을 애써 다스리는 김수영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로 시작되는 시 ‘봄밤’에서도 화자는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과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을 향해 서둘지 말라고 다독거린다. 이 시는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로 끝을 맺는데, 이것은 그가 ‘절제’를 시의 새로운 자산으로 삼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김수영 시에서 자주 돌출되던 성마름이나 예민하고 날카로운 기질이 어느 정도 순화되고 생활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에게 구수동 시절은 ‘중용’과 ‘절제’의 정신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김수영은 이제 시에 대한 조급한 욕심을 내려놓고 시를 기다리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기대나 집착도 어느 정도 비울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김수영은 사물을 바라보는 법과 사랑의 기술을 익혀나갔다.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고 담뱃갑에 썼던 메모처럼, 그는 보는 법을 배움으로써 ‘사물의 발견’과 ‘생활의 발견’, 나아가 ‘내면의 발견’을 이루어내려고 했다. 김수영의 연보를 살펴보면, 1950년대 후반은 생활이 안착되면서 문학적으로도 첫 결실을 거둔 시기였다. 1957년에는 김종문, 김춘수, 김경린, 김규동 등과 앤솔러지 <평화에의 증언>을 출간했고,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59년에 펴낸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에는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초기 시들이 망라되어 있다.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구름의 파수병’)고 말했던 ‘나’는 메마른 산정에서 내려와 나지막한 지상의 마을에 머물러 있다. 채소밭에서, 양계장에서, 뜰에서, 골목에서, 묵연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광야’라는 시에서 “이제 나는 광야에 드러누워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를 발견하였”다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떻게 뒤떨어지느냐가 무서운 것”이라고 그는 썼다.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속도와 사랑을 발견한 시기로 나는 김수영의 구수동 시절을 설명하고 싶다. 묵은 사랑이 껍질을 벗고 거듭나는 이 시절의 조용한 발견이 없었다면, 말년에 쓴 ‘사랑의 변주곡’이나 ‘거대한 뿌리’에 울려퍼지는 대긍정의 선언도 그토록 장엄하게 태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여름 아침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 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統覺)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진 햇살이 산 위를 걸어 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사(容赦)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려내려 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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