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겁주고 옥죄는 봉쇄 전략..'중화민족'은 누구인가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1. 7. 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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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인민들은 열렬히 화궈펑(華國鋒, 1921-2008) 주석을 옹호합니다!”1976년 문혁이 막을 내린 후, 화궈펑을 지지하는 네이멍구 몽고족의 모습/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7회>

1996년 여름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골)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교외의 한 라마교 사원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법전(法殿) 앞에 진열된 오백 나한상(羅漢像)의 코들이 하나 같이 모두 깨져 있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1967년 베이징에서 몰려 온 홍위병들의 만행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중국 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문혁 시절 네이멍구에선 34만6000명의 몽고족이 구속됐고, 그 중에서 2만7900명이 처형됐다. 1981년, 네이멍구의 당서기 저우후이(周惠)는 문혁 당시 79만 명의 몽고족이 구속되거나 밀실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1989년 발표된 네이멍구 공산당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희생자의 총수가 48만 명에 달했다. 서구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50만 이상이 구속되어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피해자의 총수는 영원히 안 밝혀질지도 모른다.

대약진운동(1958-1962)과 문화혁명(1966-1976)은 네이멍구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소수민족들에겐 끔찍한 악몽의 시간이었다. 마오쩌둥이 계급투쟁을 강조할수록 소수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는 설 자리가 좁아졌다. “계급투쟁”은 소수민족의 전통적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혁명은 전국 각지에 산재하는 소수민족들을 겁주고 억누르고 옥죄고 아우르는 중국공산당의 “봉쇄 전략(containment strategy)”일 수도 있었다.

<티벳의 수도 라싸로 몰려간 홍위병들은 “파사구(罷四舊)”의 구호를 외치며 라마교 고찰(古刹)의 유물들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https://tibetmuseum.org/revisiting-the-cultural-revolution-in-tibet/>

중국 현대사의 최대 난제 “통일된 다민족 국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강력한 중국공산당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극히 예외적인 ‘대륙 국가’(continental state)로 남아 있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인의 91.51% (대략 12억 정도)이 한족(漢族)으로 집계되고 나머지 8% (1억 5백 만 정도) 이상이 55개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기원전 221년 최초의 통일을 이룬 후, 역대의 중화제국은 적어도 “중국 본토(China proper)” 내에서는 통일 정부의 성립을 지향했고, 장시간에 걸쳐 단일한 행정체제를 유지해 왔다. 1790년 청 제국은 지속적인 팽창 및 병합의 과정을 거쳐 만주, 몽고, 신장, 티베트를 포함하는 1470만 평방킬로미터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최후의 유목제국을 세운 준가르족(族)처럼 청나라 군대에 도륙당해 소멸된 민족도 있지만, 다수의 소수민족은 청 제국의 마지막까지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식민지 민중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28대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1911년 공화혁명으로 청 제국이 해체된 직후였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르면,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고족, 만주족은 스스로 단일민족에 의한 독립적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는 천부(天賦)의 권리를 갖는다. 공화혁명을 통해 등장한 신생의 민국(民國)은 통일정부 근처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군벌들이 출현해 대규모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만약 전국의 소수민족들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국을 세운다면, 한족 중심의 중국 영토는 전성기 청 제국 영토의 절반 이하로 축소될 판국이었다.

돌이켜 보면 현대 중국사의 최대 난제(難題)는 청(淸)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다민족의 방대한 영토를 “통일된 민족국가(民族國家, nation-state)”로 재편하는 일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내걸고 계급투쟁을 고취한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도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더 긴박하고 절실한 문제였을 수 있었다.

민족 모순 문제...소수민족 결속하려 ‘중화민족' 내걸어

1950년대 중공 정부는 스탈린의 ‘민족’ 기준에 따라 여러 소수민족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1964년 중공정부는 중국에 존재하는 53개 소수민족의 실체를 인정했고, 이후 두 개의 소수민족이 추가됐다. 또한 중공 정부는 지속적으로 소수민족의 자치구를 늘려갔다.

<낡은 유물들을 모두 모아놓고 불을 지르는 문혁 시기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1947년 5월 네이멍구자치구가 처음 만들어진 후, 1990년까지 157개의 크고 작은 자치 단위가 들어섰다. 현재 중국엔 네이멍구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1955), 광시(廣西)장족(壯族)자치구(1958), 닝샤(寧夏)회족자치구(1958), 티베트 자치구(1965) 등 다섯 개의 성(省) 단위 자치구가 만들어졌다.

건국 당시부터 소수민족 문제는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존폐를 결정하는 중대사였다. 과연 56개 민족들을 결속해서 14억 인구의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 방법은 무엇일까? 마침내 중공정부가 찾은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해답은 “중화민족(中華民族)”의 재건이었다.

<“중국의 소수민족 분포도”/ https://blog.richmond.edu/livesofmaps/2017/03/03/the-map-of-chinas-ethnic-groups/>

시진핑, 중국공산당 100주년 연설서 “중화민족” 44회 밝혀

2021년 7월 1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1953- ) 주석은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 대회”에서 200자 원고지 40장을 넘는 장문의 강화문(講話文)를 낭송했다. 전문에 걸쳐 시 주석은 “중화민족”을 44회, “중국인민”을 32차례, “전국 각족(各族, 각각의 민족) 인민”을 네 차례 사용했다. 비슷해 보이지만, 이 세 단어는 엄격히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중국 헌법 서언(序言, 전문)엔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 각족 인민’이 공동으로 창조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 명기돼 있다. “전국 각족 인민”이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56개 민족의 구성원들을 지칭한다. 반면 “중국인민”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주권자를 의미한다. “전국 각족 인민”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종족적(ethnic) 개념인 반면, 중국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을 가리키는 정치적 개념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양자는 중국인의 두 가지 정체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중화민족”의 모호한 의미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 “인데, “중화민족”은 대체 무슨 뜻일까? 중화대륙에 살고 있는 한족, 장족(壯族, 1692만), 회족(回族, 1058만), 만주족(1038만), 위구르족(1007만), 묘족(苗族, 942만)은 공히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한국인 모두가 “우리 민족”이라 굳게 믿고 있는 조선족(233만) 역시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중국밖에 거주하는 해외 다양한 중국계 화교도 모두 “중화민족”의 핏줄이다. 요컨대 중화민족이란 초민족적인 “중국인”의 집합체 정도를 의미한다.

2018년 헌법 수정안에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삽입

그런 논리대로라면, 유럽인 모두를 지칭해 “유럽민족”이라 부르고, 다인종의 미국이 미국인 모두를 지칭해 “아메리카 민족”이라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에선 그 누구도 유럽인 전체를 “유럽민족”이라 부르거나 미국인 전체를 “아메리카민족”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중국의 영도자들은 거리낌 없이 초민족적 “중화민족”의 개념을 주야장천 상용한다.

급기야 2018년 3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수정안”은 헌법 전문에 분명하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한다!”는 구절이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엔 단지 “부강하고 민주적인 문명의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만을 목표로 내세웠는데, 이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국가의 최고 목표가 됐다. 중국인민이 아니라 중화민족이 민족중흥의 주체로 우뚝 선 셈이다.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보단 “중화민족의 국가”로 재정립됐다.

<2021넌 7월 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포스터: “중국공산당이 없으면, 새로운 중국도 없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도 없다!”>

“중국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중화민족”

“중화민족”의 연원을 파고 들면 1920년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쓰기 시작한 “국족(國族)”이란 개념을 만나게 된다. 량치차오는 인종, 문화, 언어, 관습을 불문하고 중국 영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묶는 “국족”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량치차오의 “국족”은 본래 이질적인 습속의 상이한 민족도 장시간 한 나라에 살며 유전자를 섞으면 결국 하나의 “민족”이 될 수밖에 없다는 궤변이었다.

근대 민족국가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억지 주장이지만, 그 정치적 효용은 매우 크다. 가령 시진핑의 강화문을 보면, “중화민족”의 정치적 함의가 그대로 드러난다.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영도가 지속되고, ‘전국 각족 인민’의 긴밀한 단결이 이어진다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전면 건설 목표는 필히 실현될 것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필히 실현될 것입니다. 위대하고 영광되고 올바른 중국공산당 만세! 위대하고 영광되고 영웅적인 중국인민 만세!”

결국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전국 각족 인민”은 단결하라는 강력한 요구다. 14억 인구의 비대한 대륙국가을 유지하기에 “중화민족”만큼 편리한 개념은 없다. 문화, 언어, 습속이 다 다른 상이한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편의적 개념이 바로 “중화민족”이기 때문이다.

한족 91.5%..소수민족에겐 침략과 식민화 과정

1920년 9월 3일 공산당 입당 이전 마오쩌둥은 후난성의 “대공보(大公報)”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이 모두 독립국을 세워야 하며, 나아가 중국의 27개 지방들이 독자적으로 27의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30년대 초반까지도 마오쩌둥은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1931년 마오쩌둥이 장시(江西) 루이진(瑞金)에 건립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헌법대강(憲法大綱)>> 14조는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국을 건립할 수 있는 소수민족의 권리까지 승인한다. 1944년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은 티베트를 포함해 중국 지배 하 소수민족 지역을 모두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레닌은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3단계 전략을 제시했다. 1) 집권 이전엔 소수민족에게 자결권, 특히 분리(分離)의 권리를 약속한다. 2) 집권 후엔 소수민족의 분리주의는 금지하고 자치권만을 보장한 후, 동화정책 펼친다. 이후 3) 중앙집권이 강화되면, 소수민족의 전통적·종교적·문화적 활동들을 모두 금지시킨다. 크게 보면, 중공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 역시 레닌의 3단계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소수민족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중국공산당이 선전하듯 봉건계급의 착취와 제국주의 침탈이 소멸된 “인민 해방”의 실현이었을까?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에 따르면, 그 과정은 지속적인 문명화(文明化, civilization)의 장정(長征)이었다. 반면 주변부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 파란만장한 역사는 침략과 복속의 연속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사회주의 혁명의 추진은 소수민족에겐 식민화(colonization)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 소수민족 전통과 습속은 박멸 대상

사회주의자들은 집산화(collectivization)를 통한 재분배를 추구한다. 쉽게 말해, 가진 자의 재산을 몰수한 후 모두에게 균등하게 나눠준다는 이념이다. 그러한 과격한 사회 재편의 논리를 가진 자라면, 똘똘 뭉쳐 자기들만의 전통과 습속에 따라 살아가는 소수민족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선 소수민족의 지배구조, 문화전통, 종교관념, 생활습속까지 박멸의 대상이 된다. 억압과 착취에서 인류를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념이 또 다른 제국주의의 논리가 된 소이가 거기에 있다.

근대 서구 열강이 문명화의 이름으로”백인의 책무”를 주장하며 아시아-아프리카의 “비문명 사회”를 식민화했듯 중국공산당은 공산화의 명분으로 “한족(漢族)의 책무”를 떠안고 55개 소수민족의 영토를 차례차례 접수하고, 복속시켰다.

<절대 다수의 한족(漢族)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의 단체 사진. 오늘날 중국에서 중화민족 혹은 중국민족은 이 모든 소수민족들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https://www.ifreesite.com/population/ethnic-group-in-china.htm>

원론으로 돌아가서 묻지 않을 수 없다. 56개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가 어떻게 “중화민족”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중국 전체인구의 91.51% 정도가 한족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열 명 중 아홉 명이 “중화민족”에 동의한다면, 나머지 한 명의 민족적 정체성 따위는 쉬이 무시될 수 있다. 결국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중화민족”이란 개념이 널리 상용되고 있음은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한족 중심”의 “다수 지배(majority rule)”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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