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쥴리-Yuji 프레임에 반대한다

한겨레 2021. 7. 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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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정희진의 융합 _28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현실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어

융합은 당파성에 따라

현실을 취사선택하는 정치적 결단

사회 구성원의 안목이

어떤 장면이 중요한지를 결정

윤석열 둘러싼 현재의 잘못된 프레임

김건희 전직과 논문은 중요하지 않아

그들이 ‘왜’ 부부인가가 논쟁의 핵심

융합은 앎의 화학이다. A와 B를 더했을 때 A+B에서 멈추지 않고 C, D, Z 등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더하기(다학제, 간학제 등)는 융합의 일부분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A와 B가 무엇이고, 이들은 어떻게 만나는가다. 1+1=2지만, 이는 양의 정수일 때만 해(解)이다. -1과 -1을 더하면 -2가 된다. 더할수록 마이너스다. A와 B가 양의 정수냐 음의 정수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공부를 잘하는 첫 번째 방법은 기존 지식이 형성된 전제(前提)를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면 답은 ‘저절로’ 나온다. 모든 지식에는 전제(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학 시간 강사로 일할 때 경영학과 학생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경영학은 솔루션에 관한 학문인데,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해결해야 할 상황의 전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학 덕분에 전공 학점이 잘 나와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주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한 경우다. 이처럼 융합은 지식 습득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의 지도를 만드는 연습이다.

흔히 말하는 “자기 영역을 튼튼히 한 후에 융합”, 이는 반만 정당하다. 자기 영역은 전공 개념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가치관을 말한다. 가치 지향 없는 공부야말로 기후 위기, 인간성 위기를 불러오는 재앙이다. 전제, 즉 언어의 한정된 상황을 인식하는 것은 맥락을 알기 위해 필수적이다. 언어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 아무 지식이나 보편화되고 중립이라는 권력을 갖게 된다. 일반화가 습관이 되면 문제 해결 능력을 잃게 된다. 현실은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당파성은 지식의 본질적 성격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는가를 결정한다. 아니라면, 굳이 융합일 필요도 없다. 본디, 융합은 부정의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탄생했다.

무엇을 볼 것인가

세상을 한 화면에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특히 현실 정치와 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라고 한다. 프레임, 사고의 틀, 액자화(額子化)는 세상을 보는 이치다. 액자의 ‘액’에는 편(扁)이라는 의미가 있다.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편’은 넓적하면서도 치우치고 작지만 골고루라는 뜻으로, 보편성과 당파성은 대립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글자다. 모두가 당파적인데, 자신의 당파성을 알고 추구하는 이들과 모른 채 보편적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인가에 따라 프레임의 범위가 정해진다. 틀에 따라 현실은 취사선택되고, 무엇이 공동체의 정의를 위한 진짜 중요한 문제인지가 결정된다.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는 인식자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융합은 프레임 이동의 정치다.

오래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거 도중 논란이었던 ‘지역 비하 발언이 문제냐’ ‘발언 도청이 문제냐’, 이 사례에서 나는 후자보다 전자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논쟁이나 정책 영역에서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원전, 국방비, 기본소득, 보살핌 윤리, 세대갈등 등 의제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에 따라 자원 배분과 해결책이 달라진다. 부수적이거나 무관한 장면이 정면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맥거핀(의도)이거나 무지(탈정치) 때문이다.

현실을 선택하는 능력, 안목은 융합적 사고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이다. 안목은 그 사회의 수준과 개인적 노력, 환경의 총체다. 무엇이 중요하고 바람직하고 아름답고 그렇지 않은지 판단력이 없는 사람을 만나서 잘못 엮이면 내 인생도 재앙이다. 파트너 선택이 가장 흔한 예다. 자기 프레임을 모르는 사람이 오피니언 리더, 고위 관료, 통치자가 되면 역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민생의 고통은 말할 것이 없다.

사회의 운명은 리더만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안목에 달려 있다.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어떤 통치자도 국민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는 동시에, 통치자가 아무리 능력 있어도 우중(愚衆)을 당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물론, 우중의 반대말이 엘리트나 지식인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당대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임무’는 우중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안목 있는 이가 대중의 지지를 받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지난 14일 국회 교육위원회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하 윤석열씨)의 부인 김건희씨의 논문을 두고 여야가 충돌하면서 파행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여당의 공격에 항의하며, 회의 도중 전원 퇴장했다. 아니, 일국의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논의할 의제가 대선 후보 부인의 논문인가? 윤석열씨를 판단하는 잘못된 사고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왜 처가를 검증하는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검사 스폰서’와 같은, 일부 검사들의 전통적인 비리 등이 있는지다. 이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검찰 탄생 70년 동안 벌어진 구조적 현실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법률 서비스(재판)에서 검찰이 일제 잔재를 그대로 두고 상식을 초과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생긴 비극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검찰 개혁은 여야의 잘잘못을 따질 새도 없이, ‘산으로 갔다’.

안목 없는 여론과 김건희씨의 ‘승리’

소송에 얽힌 이들은 원고·피고, 형사·민사 할 것 없이 절박하다. 억울함과 분노, 두려움, 돈, 인생이 걸린 일이다. 사람들은 사력을 다해 비싼 변호사를 ‘사고’, 검사나 판사는 갖가지 유혹에 노출되기 쉽다. 더구나 거액의 사기를 당했는데 복구할 방도가 없거나, 상대방의 죄질이 나쁘거나(“×××에게 걸렸거나”), “판검사가 있는 집안”에 걸렸거나, 연줄이 막강한 상대를 만나면 절망적이다.

재판 결과가 법대로가 아니라 어떤 판검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상대편이 검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매수했다면? 관행, 반(半)제도화된 구조가 아닌가.

윤석열씨를 둘러싼 주된 여론을 보자. “노무현 대통령처럼 사랑하는 부인을 버릴 수 없다”, “연좌제 없어진 지 오래다”, “업소 경력은 국모의 자격 미달”, “집사람은 술을 못한다, 새벽까지 공부만 하는 사람”, “대학의 고질적인 논문 부정의”, “해괴망측한 이야기”, “가족 리스크는 극복될 것”, “부잣집 딸이 왜 그런 데서 일하겠는가” 등 엉뚱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

이처럼 진보 언론을 포함, 여론은 김건희씨의 과거와 논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중에는 여성 혐오적 인식도 많다. 후보 부인의 전직이나 섹슈얼리티가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맥락은 완전히 다르지만,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인물 에바 페론도 영부인이 되기까지 삶은 주로 ‘거리에서’였다.

이제까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 구조로서 젠더를 가시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노동시장의 성차별, 성별 분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젠더는 동시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기도 한다. 이번 사건의 경우 젠더는 본질적인 문제를 은폐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김건희씨는 억울하다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여론은 그를 도왔다. “회원 유지(Yuji)”와 “쥴리”는 비판이든 조롱이든 냉소 등 그 자체로 윤씨를 삭제하고 문제의 성격을 이동시켰다.

나는 김건희씨의 이력, 전·현직, 논문에 관심이 없다. 내가 궁금한 점은 윤씨 부부의 탄생이, 검찰 제도의 산물인가 여부다. 국회 교육위가 다투는 그녀의 논문은, 이 ‘진실’ 이후의 문제다. 물론 천정환 교수의 지적대로, 오늘날 대학은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부패해 있다. 이제 한국 대학은 사회 평균보다 민주주의 수준이 낮은 곳이 되었고, 김건희씨는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한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융합이 왜 융합일까. 융합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 자본은 융합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핵심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학은 학생 유치를 위해 가르치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다양한 학과 이름을 만든다. 나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이를 위해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이 때문에 융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융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다. 가치관, 당파성이 문제를 인식하는 범위와 초점을 정한다. 이번 정권 내내 우리 사회는 검사 한 명이 의제를 장악하고 전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공동체 구성원의 안목이 부족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김씨 부부인지, 윤씨 부부인지 이들을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들 인연의 ‘필연성’을 분석하는 것이 이번 대선에 접근하는 기본 프레임이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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