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의 벽이 무너지는 날은 올까요?

이정연 2021. 7. 16.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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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고모는 물을 많이 닦네. 음…. 나는 이렇게 잘 안 닦는데. 이렇게 닦는 거 뭐라고 하지?”

“꼼꼼하게 닦는다고?”

“응! 맞아! 고모는 꼼꼼하게 물을 닦네!”

6살인 조카가 몸을 씻자, 수건으로 몸을 닦아줬다. 조카는 ‘꼼꼼하게’라는 말을 발견하고 시원하게 웃었다. 6살 어린이의 언어 세계에 빈칸이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설명할 수 없던 무언가를 설명하는 말을 얻었을 때 언어는, 세계는 확장된다.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확장되는 세계는 어느 순간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다. 여성인 나, 나의 몸, 내가 겪는 현실을 설명할 때 채워지지 않는 빈칸들을 발견한다. 젠더 편향의 사회에서 여성 관련 데이터들은 빈칸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설명되지 않은 채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그 빈칸들이 모여 만든 벽은 너무 단단하고 높다.

지난 12일 <한겨레> 젠더팀의 최윤아 기자가 5회짜리 기획 연재 ‘젠더 데이터, 빈칸을 채우자’의 첫 기사를 선보였다. 치안 정보의 보고인 112신고를 분류하고 통계를 만들 때 신고자 성별 분리 등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이어 산업재해 관련 통계와 채용 관련 통계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걸 지적했다. 다음주엔 네번째, 다섯번째 기사가 나간다.

빈칸으로 이루어진 벽을 오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젠더 데이터의 공백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없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현상, 숫자를 확인하고 해석하고 전달하기는 등산로가 있는 산에 오르는 것, 그 테두리가 분명하지 않은 빈칸을 조금이나마 채워가며 설명하기란 맨손으로 빙벽에 오르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고 떠올렸다.

남성 중심의 사회, 특정 성별에 편향된 사회에서 여성과 그들이 처한 현실을 설명하는 데이터는 아직 너무 부족하다. 최윤아 기자가 젠더 데이터 공백을 취재하는 과정을 보면서 빈칸에 자꾸 정신과 마음을 빼앗겼다. 빈칸을 확인할 때마다 그 빈칸의 벽에 가로막힌 여성들이 떠올랐다.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배제에 화가 났다.

분노는 무기력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래 봤자 변하겠냐는 마음이 든다. 그걸 떨칠 방법은 빈칸의 벽을 함께 뛰어넘자고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라는 책과 <산만한 소녀>라는 영화 덕분이다. 정신건강의학계에서도 젠더 데이터의 공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다.

<나는 오늘 나에게…>는 임상심리학자인 신지수 작가가 자신이 진단받은 ‘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ADHD)와 그것을 둘러싼 경험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알고 난 뒤 눈이 번쩍 띄었던 부분은 여성이 이 장애 진단에서 배제되어온 사실과 그 원인을 짚었다는 점이다. 신 작가는 책에서 “그동안 에이디에이치디 여성 환자의 증상은 가정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무시되었으며, 의학 전문가들조차 스트레스, 불안, 우울 등의 문제로 자주 오진해왔다. 만약 남성과 여성 모두 에이디에이치디 진단을 받을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 왔다면, 지금처럼 성별을 구분하여 장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여자아이는 ○○○해야지”라는 통념이 여성 에이디에이치디의 가시화를 늦췄다는 점 또한 지적한다.

내년 상반기 제작 완료를 목표로 한 박보네 감독의 <산만한 소녀>는 에이디에이치디와 관련한 영화의 촬영을 도와주던 감독의 동생이 이 장애 진단을 받게 되면서 겪은 일을 비롯해 여성의 에이디에이치디를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감독은 크라우드펀딩을 소개하는 글에서 “‘(동생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이 많다면?’이라는 질문이 원인을 모르고 고통받는 에이디에이치디 여성들이 불안에 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번져, 영화를 만들어 답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썼다.

정신건강의학계의 젠더 데이터 공백. 국외에서는 활발한 문제 제기와 연구, 논의가 있다지만 국내에선 그 변화가 더디지 않을까 짐작했다. 빈칸의 벽에 가로막혔던 여성들이 크게 목소리를 내는 걸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빈칸은 금세 채워지고 말 거라고 말이다.

맨손으로 빈칸의 벽을 오르는 여성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각자의 영역에서 빈칸을 발견하고, 그게 왜 문제인지를 알리고, 빼곡하게 빈 곳을 채워간다. 빈칸의 벽을 오르다 미끄러질라치면 밑에서 떠받치는 응원과 지지의 목소리에 다시 온몸에 힘을 준다.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벽을 오르다 보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벽이 무너지지 않을까? 그렇게 확장되는 세계를 상상한다. 설명할 수 없던 걸 설명해주는 숫자와 여러 이름들을 찾는 여정은 그래서 분노와 무기력에 지지 않는다.

이정연 젠더팀장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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