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칼럼] 역사 전쟁과 대통령의 자격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2021. 7. 1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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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이룬 성취 누리면서 '순수하지 못했다'
비난하는 퇴행적 민족주의가 나라 망쳐
민족 앞세우는 역사관으로 국가의 근본 흔드는 자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 없다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이덕훈 기자

정치의 계절과 함께 대통령을 꿈꾸는 야심가(野心家)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임립(林立)한 여야 대선 주자들이 국가의 존재 이유를 꿰뚫고 있는지는 검증되어야 한다. 여론조사 1·2위를 겨루는 후보들이 출사표를 역사 전쟁으로 시작한 것이 상징적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겠다는 지도자들이 5000만 국민이 살아갈 나라의 장래 대신 과거사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참담하다. 지나가버린 옛일을 곱씹으며 민족 정기 운운하는 논평가는 준엄한 대통령의 자격을 감당할 수 없다.

대통령 자격은 국리 민복의 책임 윤리로만 판정된다. 민생 보장과 국익 창출 외 모든 것은 부차적이다. 이런 정치적 책임 윤리 지평에서 적빈(赤貧)과 전쟁의 폐허를 넘어선 우리의 성취는 정녕 자랑스럽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개발도상국 가운데 선진국으로 격상된 유일한 국가다(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7월 2일 결의).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이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한류로 전(全) 세계를 매혹하는 대중문화 강국이다. 이런 국가적 성취를 누리면서 한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나 ‘순수하지 못했던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구적 과거결정론에 불과하다. ‘특정 영토에서 폭력을 독점’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지구상 어떤 국가도 ‘순수’할 순 없기 때문이다.

정권이 조장한 관제(官製) 역사 논쟁은 나라를 망친다. 역대 보수·진보 정권 모두 역사를 정치화했지만 문재인 정권이 특히 심각하다. 문 정권은 보수 진영을 토착 왜구로 낙인찍는 민족주의적 ‘역사 다시 쓰기 공정’(工程)에 부심해왔다. 친일 적폐 청산을 내건 국민 갈라치기로 진보 장기 집권을 기획했다. 문 정권이 부추긴 퇴행적 민족주의는 대한민국 국가 대전략을 파탄 직전으로 몰았다. 국가 이성의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이 날것의 민족 감정으로 국정에 큰 부담을 안겼다.

문 정권의 역사 전쟁은 현대 동아시아 체제(한일협정 체제)를 흔드는 자충수다.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다. 문 대통령이 ‘더 이상 지지 않겠다’며 도쿄 올림픽 참석 카드를 흔드는 것도 미숙하기 짝이 없다. 민족 감정을 절제한 김대중 정부 시절엔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일본을 비롯한 주변 4강국과 외치(外治)가 최상이었다. 합리적 국가 이성에 충실했던 DJ가 국제적 리더로 존중받은 데 비해 ‘민족주의자 문재인’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감정적 대일 고자세(高姿勢)와 정반대인 굴욕적 대중 저자세도 민족주의와 모순된다. 전략핵 보유국 북한이 한국을 끊임없이 모욕해도 민족 감정으로 얼버무리는 변태적 태도가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최후의 성역(聖域)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반만년 백의민족 담론은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자존감의 근원이다. 근대 이후에 민족주의가 등장한 서구보다 훨씬 오래된 언어·영토·혈통의 지속성이 한국인의 민족 감정을 떠받쳐왔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주의가 방어적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이 민족 정서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한국인의 자기 확신을 극대화했다. 민족을 국가보다 앞세우는 한국인의 마음의 습관이 굳어진 배경이다.

그러나 한국 민족주의의 신성한 아우라(Aura)는 국가가 국제정치의 주체라는 현실 인식을 방해한다. 한반도를 초토화한 6·25전쟁은 백의민족이 아니라 남북한 두 주권 국가가 한반도 현실 정치의 실체라는 교훈을 증언한다. 북한과 한국이 서로를 무력으로 절멸하려 한 국가총력전을 ‘민족 통일’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6·25전쟁의 산물인 북한 핵무장을 국가적 비상사태로 여기지 않는 우리네 풍조는 민족주의적 소망 사고(wishful thinking)가 국가에 끼친 치명적 폐단을 웅변한다.

역사 전쟁은 국가 수호와 국민 보호에 백해무익하다. 문 대통령에게서 보듯 우린 너무 오랫동안 민족을 앞세워 국가를 허물어트리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왔다. 대통령 자격과 성숙한 국민 자격은 동행한다. 민주공화국이자 자유민주주의 헌정 국가인 대한민국을 어설픈 역사 논쟁으로 흔드는 정치꾼은 대선 과정에서 걸러내야 한다. 내일이 제헌절이다. 새 대통령은 헌법 제69조에 의거, 다음과 같이 취임 선서하게 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에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통령 자격의 시작이자 끝이다. 감상적 민족주의로 국가의 근본을 허무는 자(者),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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