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 만에 개도국 벗어났다는데..한국이 된 '선진국'이 뭔가요
선진국들 파트너 된 韓.. 회원국 만장일치로 결정
한국에 조정국 역할 기대..K-방역 성과도 한몫
대한민국이 또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설립 이래 최초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지위를 인정받은 나라가 됐는데요. 특히 이번 결정에 참여한 회원국들의 만장일치로 결정됐다고 합니다.
사실상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 통한다는 걸 세계 모든 국가가 인정했다고 볼 수 있죠.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초청국으로 높아진 존재감을 과시한 데 이은 또 다른 쾌거입니다.
UNCTAD는 개도국의 산업화와 국제 무역 참여 증진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엔 총회 산하 정부 간 기구입니다. 195개 회원국으로 구성됐죠.
한국의 선진국 지위 인정을 두고 파키스탄 주제네바 대사는 아시아·태평양 그룹을 대표해 "한국이 여러 그룹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희망한다"고 했고, 유럽연합(EU)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냈는데요.
유엔 총회도 아닌 산하 기구에서 일어난 일인데, 왜 이렇게 주목을 받는 걸까요.
1964년 UNCTAD가 설립된 이래 지위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기 때문입니다.
UNCTAD는 경제 규모와 위치 등을 고려해 4개 그룹으로 나누는데요. 아시아·아프리카 등 주로 개도국이 포함된 그룹 A(99개국)와 선진국 그룹 B(31개국), 중남미 국가가 포함된 그룹 C(33개국), 러시아 및 동구권 그룹 D(25개국) 등입니다.
한국은 1964년 3월 가입한 이후 지금까지 A그룹에 속해 있었는데요. A그룹에서 B그룹으로, 즉 개도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가 변경된 건 한국이 처음입니다. 한국의 지위 변경으로 B그룹 국가는 31개에서 32개로 늘었습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세계 10위로, 경제 규모만 놓고 보면 사실 일찍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죠.
세계은행이 2019년 7월에 발표한 전년도 한국의 GDP는 1조6,194억 달러(약 1,895조 원)로 세계 12위였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8월 한국의 세계 GDP 순위가 9위로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경제력만 놓고 보면 지위 격상은 한참 늦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 부국 싱가포르도 A그룹인데… 높아진 韓 위상
하지만 UNCTAD의 지위 변경은 단순히 경제 규모만 크다고 결정되는 건 아닙니다. 아시아의 부국으로 꼽히는 싱가포르는 B그룹이 아닌 A그룹에 속해 있는데요. 2019년 기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약 6만5,000달러로, 한국(3만2,000달러)보다 높았습니다.
세계 모든 국가가 '이 나라는 이제 선진국이다'라고 인정해줘야만 가능합니다. 회원국 중 단 한 국가만 반대해도 지위 격상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한국이 이번 선진국 그룹에 속한 의미가 남다른 이유죠.
B그룹에 속한 일본이 한국의 그룹 이동에 찬성한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일본은 앞서 지난달 영국 콘월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때 한국을 견제했었죠. 한국의 그룹 이동 전까지만 해도 B그룹에 속한 아시아 국가는 일본이 유일했는데, 이제 한국과 일본이 똑같은 그룹에 속하게 된 겁니다.
이태호 대사 "B그룹 이동 시도한 국가 중 韓이 처음 성공"
보통 특정 국가가 그룹을 옮기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회원국들은 협의에 들어갑니다. UNCTAD가 2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 마지막 날 회의에서 한국의 그룹 변경 안건을 통과시켰는데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태호 주제네바대표부 대사는 현지 분위기를 이같이 전했습니다.
이 대사는 7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이런 사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금 조마조마했다"며 "다행히 아주 순탄하게, 신속하게 진행이 잘돼서 UNCTAD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룹A와 그룹B 국가들의 반응에 대해선 "선진국으로 옮겨 가겠다는 우리 입장에 대한 선진국의 반응은 굉장히 환영하는 분위기였다"며 "떠나보내는 입장인 개도국들 반응이 중요한데, 이번 아시아·태평양 지역 조정국인 파키스탄 대사가 '환영한다'고 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대사가 반대표가 나올까 '조마조마했다'고 한 건 과거에도 그룹 이동을 시도한 국가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이 대사는 "과거 개도국 그룹이 선진국 그룹으로 이동하려는 시도가 있긴 있었다"며 "정치적인 이유 등 여러 사유로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과거 그룹 이동을 시도한 국가명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개도국들, 한국의 새로운 리더십에 굉장히 기대"
한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뀐 전무후무한 국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도국들이 만장일치로 한국의 지위 격상을 인정한 건 이 부분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요.
한국이 개도국과 선진국을 모두 경험한 나라인 만큼 국제무대에서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주길 바라는 기대감이 반영됐다는 분석입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6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개도국들의 목소리"라며 "(개도국들은) 한국이 자신들과 선진국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설명했습니다.
최 교수는 "(개도국들은 한국이) A그룹에 있었으니 우리 사정을 잘 알지 않겠나, 그런 바람이 담겨 있다"며 "대한민국이 국제 관계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리더십에 굉장한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선진국들이 대한민국을 파트너로 인정한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최 교수는 "G7 정상회의에서 확인한 게 전통적인 선진국들이 대한민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며 "B그룹이 굉장히 독특한 구조인데, 대한민국을 인정했다는 건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 모두 지금 한국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K-방역으로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한국의 존재감
한국의 그룹 이동에는 'K-방역 성과'도 한몫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이 대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과 존재감이 달라졌다고 전했는데요.
그는 "정부가 개방성, 투명성, 민주성이란 대원칙을 견지하면서 경제를 완전히 닫지 않고 운영해 온 데 대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칭찬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습니다.
최 교수는 한국이 K-방역 성공 사례를 전파해 주길 바라는 개도국이 많다고 했는데요.
그는 "백신 접종과 방역 문제로 (전 세계) 양극화가 심각하다. UNCTAD 최근 보고서에도 이 문제가 나왔다"며 "백신 접종률이 1%도 안 되는 개도국도 있는데, 이들은 (코로나19 사태에서) 국제 연대와 협력을 강조해 온 한국이 교량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번 지위 변경으로 한국의 활동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의 위상을 인정받은 상징적 조치이기 때문이죠. 한국은 이미 2019년 10월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실질 협상은 비공식적으로 77개 개도국 그룹(G77)과 중국, EU와 EU를 제외한 기타 선진국 그룹(JUSSCANNZ),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등을 중심으로 진행돼 왔습니다.
한국은 UNCTAD 가입 당시 G77에 속했지만, 1996년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OECD에 가입한 이후 G77에서 탈퇴, 현재는 미국과 일본, 스위스, 캐나다, 터키 등이 포함된 JUSSCANNZ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류호 기자 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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