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배신으로 얻은 작은 부귀
[고구려사 명장면-127] 나라가 멸망할 때에 국운과 개인의 영화를 맞바꾼 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있는 법이다. 그 나라의 통치 권력이 공공성을 잃고 사리사욕에 급급하면, 지배층에서는 언제든지 이런 인물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백제도 그러했고 고구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백제 멸망기에는 성충과 흥수, 계백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갖은 시기와 탄압 속에서 비록 나라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두고두고 충절의 표상으로 기억된다. 고구려에도 의당 이런 인물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안타깝게 그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대신에 배신으로 나라를 멸망에 빠뜨린 이름이 치욕의 역사를 환기한다. 바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다.
남생은 아들 헌성과 함께 중국 역사책 <신당서>에 당나라 관리로 열전의 한 자리를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수치스러운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20세기 초에 남생과 아들 헌성, 증손자 비(毖)까지 4대의 행적을 담은 3개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배신으로 얻은 가문의 부귀와 세습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남생 동생 남산의 묘지명까지 더하면 연개소문 후손으로 모두 4인의 묘지명이 전해진다. 고구려 최말기를 호령했던 집권자 연개소문의 후손들이 중국 낙양 북망산에 묻혀 있다는 게 그들 가문의 수치를 보여준다.
묘지명에 의하면 남생은 당군 사령관 이세적과 함께 평양성을 공략했다. 평양성문을 열어주었던 승려 신성도 남생과 내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장왕과 남건, 남산 등 포로를 이끌고 당에 들어간 남생은 그래도 형제간의 의리가 있었는지 당 고종에게 호소하여 사형에 처하게 된 동생 남건을 귀양으로 감면했다고 한다. 아무리 동생이지만 평양에 남은 자기 아들 헌충을 죽였는데 감면을 호소했다는 게 다소 납득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들 헌성의 묘지명에서 다소 짐작되는 바이다.
남생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공훈을 인정받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오르고 식읍 3천호를 받았다. 남생의 배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676년 나당전쟁에서 패한 당은 667년 2월 요동의 불안한 정세를 통제하기 위하여 보장왕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에 임명하여 요동성으로 보내어 고구려 유민을 안무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신성(新城)으로 옮긴 안동도호부에는 남생을 파견하여 보장왕을 견제하도록 했다. 그만큼 당 조정의 신임을 듬뿍 받은 것이다. 남생은 그곳에서 679년 1월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옮겨 묻혔다.
묘지명이라고 해서 남생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묘지명 자체가 당 문인에 의해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묘지명에는 한 조각 안타까움도 비치지 않는다. 구구절절 당에 대한 충심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변명만 가득할 뿐이다. 아마 그런 태도가 남생과 그 후손들의 생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한 번의 배신은 그 배신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배신을 거듭하는 법이다. 역사 속에서 그런 사례는 숱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일제강점기만 들여다보아도 된다.
남생 역시 안동도호부에 머물면서 고구려 부흥을 꿈꾸는 보장왕과 철저하게 고구려 유민들을 탄압한 듯하다. 남생이 죽고 나서 2년 뒤에 보장왕이 소환되어 귀양 간 점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나라를 철저하게 배신한 대가로 그의 자손들은 부귀를 누릴 수 있었을까?
아들 헌성은 비록 16세였지만 아버지와 함께 당에 투항하여 고구려 멸망에 일조하였다. 게다가 헌성은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천헌성 묘지명>에 의하면 679년 아버지 상중(喪中)에도 반란군 토벌에 동원되었고, 그 뒤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고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올랐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반란군 토벌에 투입되었다. 당은 이민족을 정벌할 때 다른 이민족 출신을 동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아마도 천헌성도 그런 인물 중 하나로 공훈이 적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민족 출신은 어디까지나 이민족 출신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자치통감>에 전하는 다음 예화에서 이런 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690년에 측천무후가 금보(金幣)를 내어 신하 중에 활 잘 쏘는 사람 5인을 뽑아 내기를 하게 하였는데, 헌성이 1등을 양보하였지만 다시 헌성을 1등으로 지목하였다. 헌성은 무후에게 아뢰기를 "폐하가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셨는데, 모두 한관(漢官·한족 관리)이 아닙니다. 사이(四夷)가 한(漢)을 가볍게 여길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이 활쏘기를 멈추소서"라고 하니 무후가 좋게 여겨 그 말을 따랐다.
멸망한 나라 고구려 유민으로서 한인(漢人) 관리와는 다르다는 차별을 실감하면서 조심스러워하는 신중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고구려에 있을 때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누리던 집안이었는데 당의 조정에서 이런 눈치 저런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과연 헌성의 심사는 어떠하였을까?
692년 2월에 헌성은 측천무후의 공적을 새긴 구리 기둥 천추(天樞)를 조성할 때 구리 등 물자를 조달하는 관직을 맡았는데 이때 탐관 래준신(來俊臣)의 금품 요구를 거절했다가 앙심을 품은 래준신이 헌성이 모반을 꾀하였다고 모함해서 이듬해 1월에 처형되고 말았다. 나이 43세였다. 이때는 아마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헌성이 무고로 죽음에 이르게 된 데에도 고구려 유민 출신이라는 처지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성은 700년에야 무죄로 신원되었고 701년에야 비로소 장례를 치렀다. 그 뒤 그의 자손들도 작위를 세습받고 벼슬을 하였지만 헌성만큼 출신하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다만 헌성의 손자 천비(泉毖)는 과거에 합격하여 자기 능력으로 출사를 꾀하였지만 2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아버지 현은(玄隱)이 비통한 심정으로 <천비묘지명>을 지어 지금 전해진 것이다. 그 후손들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천헌성묘지명>에 필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679년 아버지 남생이 죽자 헌성이 슬퍼하여 식음을 전폐하니 조모(祖母)가 음식을 먹으라고 애써 권하여도 헌성이 듣지 않자, 조모도 스스로 음식을 끊어서, 이로 인해 헌성도 조금씩 음식을 먹게 되고 조모의 자애로움을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헌성의 조모라면 곧 연개소문의 부인이다. 연개소문과 그 후손들의 행적이 제법 남아 있음에도 연개소문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 한 줄뿐이다. 이 조모는 682년에 사망하여 당시 헌성이 조모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연개소문 부인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남편 나이를 고려하면 대략 610년 무렵에 태어나 70여 살쯤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개소문의 부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지만 따져보면 한많은 한평생을 산 셈이다.
고구려 최고의 가문인 연개소문과 혼인할 정도였으니, 부인도 이에 걸맞은 집안 출신이었을 것이다. 왕실 출신일 수도 있다. 642년 남편이 정변을 일으킨 뒤에는 최고 권력자의 부인으로 아마 왕비 못지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서 그녀의 평탄했던 삶도 깨져버렸다. 아들들끼리 서로 분란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손자가 삼촌에게 비명에 죽었다. 큰아들은 나라를 남편 연개소문의 적국이었던 당에게 넘겨버렸고, 나라는 멸망하고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당으로 이주했다. 작은아들 남건이 사형에 처해질 때 남생이 당 고종에게 살려줄 것을 호소한 것도 아마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남건은 귀양 가서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고, 첫째 남생도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 그나마 셋째 남산이 살아 있을 때 눈을 감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게다.
연개소문의 부인은 큰아들 남생이 나라를 넘겨주는 대가로 당에서 출신한 덕분에 심정은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난을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자발적으로 당에 투항한 소수 가문을 제외하고는 많은 고구려 귀족들조차 굴욕적인 수난을 겪어야 했다. 다음 회부터는 고구려 유민들의 삶과 부흥운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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