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27] 국민에게 외상 긋는 정부
신용카드는 긁는다, 단말기에. 외상은 긋는다, 외상 장부에.
옛날 보부상들이 전국 장터를 돌아다닐 때 수중에 항상 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사가 안되면, 단골 주막에서 외상 거래를 했다. 주막에 붓과 먹이 있을 리 없었다. 주모와 보부상이 글을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엄대’라는 나무 막대기를 외상 장부로 삼아 문자 대신 기호를 남겼다. 즉 술 한 잔, 밥 한 그릇에 해당하는 기호를 엄대에 칼로 그었다. 그 엄대를 주막 한 구석 벽에 매달아두고 빚 갚기를 기다렸다. 거기서 외상을 긋고, 달아둔다는 말이 나왔다. 소설 ‘객주’(김주영 작)의 한 장면이다.
외상 거래는 동서고금의 공통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엄대와 비슷한 나무 막대기를 일본에서는 가케(掛け)라고 불렀고, 영국에서는 탤리스틱(tally stick)이라고 불렀다. 나무에 칼로 새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케는 벽에 달아두었지만, 탤리스틱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씀씀이가 큰 헨리 1세가 염치 불고하고 상인들한테 손을 벌린 기록이라 되도록 감추려고 했다. 왕은 채무 사실을 칼로 새긴 탤리스틱을 둘로 쪼개 채권자에게 슬며시 한쪽을 주었다. 채권자가 받은 쪽을 스톡이라 불렀다. 훗날 주식회사의 주식을 스톡(stock)이라고 부른 것은, 헨리 1세에게 받았던 것과 기능적으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권리증이다.
스톡은 왕의 생각과 달리 세상에 금방 공개되었다. 나중에 왕에게 세금을 낼 때 돈 대신 스톡을 쓸 수 있었으므로 상인들은 상거래에서 스톡과 돈을 구분하지 않았다. 국왕의 채무 증서가 돈이 된 것이다. “국채=화폐”라는 현대 화폐 이론(MMT)의 분명한 증거다.
요즘 각국 정부가 국채를 마구 발행한다. 중앙은행은 그것을 정신없이 사들이며 돈을 푼다. 금리는 0%에 가깝다. 그러는 바람에 돈과 국채의 차이가 흐릿해졌다. 바야흐로 천 년 전 헨리 1세 시절로 돌아갔다.
지금 정부가 열심히 외상을 긋고 있다, 국민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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