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두 세력의 개혁 경쟁과 개방 경쟁
[경향신문]
메이지 정부는 수립 직후인 1868년 초 곧바로 ‘대외화친의 조서’를 발표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열강과 맺은 조약을 계승하고, 우호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었다. ‘존왕양이’와 ‘조약파기’를 부르짖으며 막부 타도파를 지지해온 많은 사무라이들은 아연실색했다. 막부의 ‘저자세 외교’를 공격하며 집권한 새 정부가 서양에 강경한 자세를 취할 거라는 기대가 초장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사실 막부 타도파의 지도자들은 서양과 관계를 단절할 생각이 없었다. 대중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겉으로는 존왕양이를 주장했지만, 내심 서양 주도의 국제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존왕양이 열기가 전국을 뒤덮었을 때 조슈번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등 ‘배외주의의 영웅들’은 장차 일본이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외국과 무역을 할 수밖에 없다는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1867년 초, 막부의 수장인 장군에 새로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오사카성에서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를 장시간 면담했다. 요시노부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막부를 전면적으로 개조하여 사쓰마·조슈번을 분쇄하려 했고, 로슈는 사쓰마·조슈번에 기운 영국에 맞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면담 시작과 동시에 로슈가 “지금부터는 장군님도 아니고 프랑스 공사도 아니고 오직 일본을 위하는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 아니면 가신으로 생각하시고 아무거나 질문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요시노부는 나폴레옹 3세의 개혁 등에 대해 상세히 물으며 로슈의 구상을 정력적으로 빨아들이려 했다. 로슈가 너무 오래 얘기해서 피곤하실 테니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자, 그는 잠깐 쉬었다 계속하자며 로슈를 놓아주지 않았다. 토론은 이튿날에도 이어졌다.
이 대화에서 로슈는 요시노부에게 개국의 방침을 서양열강에 공지하라고 제안한다. 아니, 막부가 이미 개국 방침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 아니었던가? 로슈는 “사쓰마·조슈번이 서양인들에게 ‘막부가 개국 반대의 천황 말을 듣고 개국 방침을 바꾸려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며 우려했다. 그래서 영국 공사 파크스 같은 사람은 막부보다는 이 두 번이 개국에 더 적극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임 장군이 공개적으로 막부의 개국 방침을 천명하면 서양의 강력한 지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 1860년대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벌어진 막부와 반막부의 투쟁은 개혁과 수구의 싸움이 아니라 ‘개혁 경쟁’이었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위의 대화를 보면 두 세력은 개혁 경쟁만 한 게 아니라 동시에 ‘개방 경쟁’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쓰마·조슈번은 자기들의 수도인 가고시마와 하기를 개항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막대한 무역이익이 탐났던 것이다. 이에 대해 로슈는 막부가 선제적으로 이 두 도시를 개항시키고 무역관리를 독점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면 두 번은 결사반대할 것이고 결국 서양열강에 개국의지를 의심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서양열강에 개국의지가 진정으로 있는 세력으로 인정받는가 아닌가가 당시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보면 메이지 정부가 출범 직후 많은 지지 세력의 기대를 배신하고 서둘러 대외화친을 선언한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개국의 방침을 서양열강에 공지’하라고 했던 로슈의 생각을 막부 대신 메이지 정부가 실천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반발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서양 각국은 ‘혹시 존왕양이 정부?’라는 의심을 거두고 메이지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국제정세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이 아닌 이상, 어떤 나라도 그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섣불리 ‘민족자존’ 운운하는 것보다 폼 나진 않지만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길을 가지 않으면, 혹은 그 길을 찾아낼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민족자존은 공염불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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