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문10답>最古 한글 금속활자.. 인쇄본만 전하던 '동국정운식 표기' 실물 첫 확인
■ 인사동서 발굴된 유물
정사각 모양 ‘갑인자’ 최종공인땐, 구텐베르크보다 20년 앞선 활자 실증
금속활자 1600여점 무더기로
자동물시계 시보 장치도 ‘햇빛’
조선 전기 과학기술 연구 큰 획
종로 일대‘조선의 폼페이’입증
지난 6월 29일 오전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결과 브리핑이 있었던 국립고궁박물관 강당. 유물 내역과 그 의미를 설명하러 나온 서지학·고고학·국문학·과학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의 표정이 상기돼 있었다.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져 온, 조선 시대의 과학기술과 인쇄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까닭이다. 발굴 유물은 1600여 점에 달하는 조선 최고(最古)의 한글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 인쇄기보다 앞선 조선 갑인자(1434년) 추정 한자 금속활자, 자동 물시계와 천문시계 부품 등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도 놀랍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밀 분석을 통해 훨씬 더 놀라운 게 확인될 수도 있다. 이번 유물 발굴을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봤다.
1. 어디서, 뭐가 나왔나
유물이 발굴된 곳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일원. 종로2가 사거리에서 인사동길로 접어드는 입구, 탑골공원 건너편 피맛길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한양도성의 중심부로, 주변에 의금부와 전의감 등 관청과 순화궁·죽동궁 등 왕실 궁가, 상업시설인 시전행랑이 위치했던 운종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유물 발굴 지점 자체는 관청 등과는 무관한 민가의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조선 전기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과 자동 물시계의 주전(籌箭·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시보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승자총통 8점, 동종 1점 등 금속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됐다. 도기 항아리 안에 금속활자와 동으로 만든 유물이 담겨 있었고,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동종과 동판, 일성정시의, 총통류 등은 항아리 밖에 쌓인 형태로 묻혀 있었다. 총통류와 동종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은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2. 출토된 한글 금속활자는
조선 전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한글 금속활자 약 600점, 한자 금속활자 약 1000점이 발굴됐다. 우선, 순경음(ㅱ, ㅸ)과 이영보래(ㅭ), 반치음(ㅿ) 등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표기법을 따른 한글 금속활자 실물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세종 때인 1448년 간행된 국내 최초의 음운서 동국정운에 나온 표기법은 1480년대 초반 이후에는 사용된 흔적이 없고, 그동안 인쇄본으로만 확인됐을 뿐이었다. 이는 이번에 나온 금속활자가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 실물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기존의 최고 한글 금속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을해자 30여 점이었다. 을해자는 세조 때인 1455년 처음 주조돼 100년 가까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박물관 소장 을해자는 1461년 제작된 ‘능엄경언해’에 쓰인 글자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전문가들은 이번에 발굴된 금속활자가 그보다 앞선, 적어도 ‘초기 을해자’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3. 한자 금속활자의 의미는
이번에 발굴된 금속활자 1600여 점은 서체, 크기와 형태, 뒷면 깎음새 등에서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크기만 해도 최소 8가지 이상이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한자 금속활자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을해자뿐 아니라 을유자(1465년), 심지어 갑인자로 보이는 것도 나왔다. 갑인자는 1434년 갑인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한자 활자로, ‘조선 금속활자의 꽃’으로 불리는데, 그동안은 인쇄본만 전해졌을 뿐 금속활자 실물이 발견된 적이 없었다. 이승철 청주시 고인쇄박물관 학예사는 “갑인자는 생김새가 정방형(정사각형)으로 균일하게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금속활자와 확연히 다르다”며 “1차 육안 감식에서 갑인자 인쇄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글자가 8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들 금속활자가 갑인자로 최종 공인될 경우 이는 세계 서지학계를 들썩이게 할 만한 ‘일대 사건’이라는 게 학계의 반응이다. 갑인자는 구텐베르크 인쇄기보다도 20년가량 앞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인쇄본만 전해져 왔으나, 인쇄본과 금속활자를 동시에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4.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중요한 이유는
금속활자의 역사는 조선보다 앞선 고려에서 이미 시작됐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상정예문’이라는 책을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나올 뿐 아니라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 실물이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쇄본이 아닌 고려 금속활자 실물은 몇 점 안 된다. 2010년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증도가자’ 12점이 공개됐으나, 이는 진위 논란에 휩싸여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학계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에 주목하는 이유는 금속활자를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실하게 기록하고, 제대로 된 인쇄본으로 남기기 시작한 게 조선 시대부터이기 때문이다. 조선 금속활자는 1403년 태종이 설치한 주자소에서 개발됐다. 갑인자부터는 인쇄의 질과 하루 인쇄량도 크게 개선됐다. 특히 현존 금속활자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이번에 발견된 조선 전기 활자는 금속활자 기술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하다.
5. 인사동 금속활자 확인은 끝났나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도 학계가 들썩이고 있지만, 인사동 금속활자 1600여 점에 대한 확인 작업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활자를 알코올로 씻어 육안으로 1차 조사를 벌였을 뿐이다. 항아리에 담긴 채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만큼, 눌어붙어 있거나 형태가 불분명해 보이는 활자들도 적지 않다. 추가 세척과 손질 등을 거쳐 활자를 찍어 보고, 이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인쇄본 글씨와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어떤 인쇄물 제작에 쓰인 활자인지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것을 뛰어넘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자 금속활자의 경우, 갑인자 추정 활자가 확실하게 갑인자로 판명될지 주목된다. 현재까지는 모양새 등으로 미뤄 갑인자로 추정되는 활자가 8개 확인된 수준인데, 정밀 조사 과정에서 그 숫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또 인쇄본과 정밀 대조를 하면 이들이 갑인자인지 여부가 분명하게 판명될 수 있다. 한글 금속활자는 초기 을해자보다도 앞서 제작된 활자로 확인될지 주목된다.
6. 자동 물시계, 일성정시의 부품의 의미
금속활자가 담긴 항아리 안에선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금속유물도 발견됐다. 동그란 구멍이 있고 ‘일전(一箭)’이라는 글씨를 새긴 동판, 걸쇠와 은행잎 형태 갈고리가 결합한 구슬 방출 기구로 구성됐다. 이는 ‘세종실록’에 나오는 주전 관련 기록과 일치한다. 물이 차오르면 작은 구슬을 방출하는 시보(時報) 장치인 것이다. 이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 제작된 흠경각 옥루 또는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에 설치된 보루각 자격루의 부품일 가능성이 있다. 옥루는 현존하는 부재가 전혀 없고, 자격루는 물통 일부만 남아 국보로 지정됐다. 일성정시의는 낮에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도구다. ‘세종실록’에는 1437년 일성정시의 4개를 제작했다고 기록됐는데, 전해지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7. 다시 세종이 주목받는 이유
다량의 금속활자와 자동 물시계, 일성정시의 등 이번에 발굴된 인사동 유물 대부분은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과 연결된다. 특히 금속활자들은 세종 시기 훈민정음 창제뿐 아니라 인쇄 기술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후 이를 활용한 출판에 힘을 쏟았는데, 필사 수준을 넘어 목판과 목활자, 금속활자 등 당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쇄 기술을 시도했다. 1446년 제작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목판본으로 찍었다. 한쪽씩 나무판에 새겨 찍은 것이다. 1447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한자(갑인자)와 한글 모두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해 인쇄했다. 1448년 ‘동국정운’은 한글은 목활자, 한자는 금속활자(갑인자)로 찍었다. 이승철 학예사는 “갑인자 전까지는 금속활자가 정교하지 못하고 몇 장만 인쇄해도 활자가 흔들리는 수준이었는데, 갑인자부터는 그 정교함이 정점에 올라 조선 후기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8. 언제 누가 왜 묻었나
인사동 유물은 1588년 이후에 인위적으로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활자 등과 함께 발굴된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승자총통 1점은 1583년에, 소승자총통 7점은 ‘만력 무자년(1588년·선조 21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파편 형태로 나온 동종은 1535년(중종 30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 가운데 금속활자와 주전은 항아리에 담겨 묻혀 있었는데, 항아리 굄돌 등으로 미뤄 누군가 일부러 보관하기 위해 이를 묻은 게 확실해 보인다. 주전과 총통 등은 모두 일정한 크기로 잘려져 있었다. 유물이 나온 곳은 궁궐이나 관청과는 상관없는 민가 터다. 이 때문에 누군가가 이들 금속유물을 재활용하기 위해 갖고 있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을 떠나면서 땅속에 묻고 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9. 종로 일대 발굴 잇따르는 이유는
조선 한양도성의 옛 4대문 안, 그중에서도 종로 일대는 ‘조선의 폼페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규모 재개발 공사가 있을 때마다 그야말로 ‘파면 뭔가 나온다’는 게 입증됐다. 지난 2009년 청진동 피맛골 재개발 당시 조선백자 3점이 출토됐고, 2009년 광화문광장 조성 때에는 육조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2015년 공평동 재개발 과정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 시대 공사 기법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선 시대에는 건물이 허물어지면 흙으로 덮어 묻고 그 위에 다시 건물을 올리는 식이었다. 특히 한양도성 내부는 습지가 많아 이런 건축법이 자주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 결과 궁궐과 관청 등이 밀집해 있던 종로 일대에서는 땅속 4∼6m 깊이까지 켜켜이 쌓인 문화층이 발견된다.
10. 유물 나오면 개발은 불가능한가
현행 매장문화재보호조사법 36조는 정당한 사유 없이 매장 문화재 보존조치 명령, 공사중지 명령, 발굴 정지 또는 중지 명령, 발굴 완료 후 필요한 사항 지시 등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같은 법 35조는 정당한 사유 없이 매장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부하거나 방해·기피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발굴을 거부하거나 방해·기피한 사람에게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재는 국가에 귀속된다. 그러나 서울시는 사업자에게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이른바 ‘공평동 룰’이다. 2015년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일대에 종로 센트로폴리스를 짓기 위해 땅을 파다 108개 동의 건물 터와 골목길, 1000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다. 서울시는 도로·골목·집터는 원위치에 보존하고 건물 지하 1층을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가꾸게 했다. 그 대신 시행자 측에는 용적률 200%를 더 부여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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