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여름, 잡초 이야기②

2021. 7. 6.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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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학 번역가

몇 해 전 이곳 산자락 맹지를 구입해 텃밭을 마련할 때만 해도 내 밭에 환삼덩굴, 애기똥풀 같은 잡초는 발을 못 들이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생전 처음 내 땅을 마련했으니 어떻게든 청정 지역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허망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텃밭을 찾는 나로서는 번식을 막기는커녕 텃밭 여기저기 촘촘히 박힌 어린 싹을 찾아내는 것도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장마를 앞둔 요즘 잡초의 종류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이번에 텃밭에 나가 확인해 보니 쇠뜨기, 바랭이, 비름나물, 명아주 등 이른바 ‘잡초’라는 불명예를 쓴 식물만 해도 어림잡아 50~60종류는 되는 듯싶다. 잡초는 그 하나하나가 생명력의 끝판왕이다. 예를 들어 번식의 왕 칡만 해도 그렇다. 이곳은 산기슭이라 농막 주변에 칡이 무성한 편이다. 칡은 근두(根頭) 하나에서 줄기가 스무 개씩 뻗어 나오고 따뜻하고 습한 여름이면 줄기 하나하나가 하루 20~30센티미터씩 자란다. 뿌리도 굵고 깊어 포클레인이 아니면 근절 자체가 불가능하다. 요즘 공정한 경쟁 운운하지만 솔직히 공정하게 싸우면 밭작물 따위는 잡초한테 게임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잘났다 한들 밭작물이야 기껏 주인의 구미에 맞는다는 이유로 과보호받는 존재들이 아닌가. 하기야 차별은 그대로 두자면서 공정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 같기는 하다.

잡초라는 이름 자체가 편견이다. 위키백과에 보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때와 장소에 적절하지 않은 식물”이다. 요컨대 인간의 입맛에 따라 등장한 개념이지만 그마저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른 봄 텃밭 여기저기 피어나는 제비꽃, 민들레는 좋은 식재료이기도 하지만, 겨우내 꽃에 굶주린 마음을 토닥토닥 보듬어 주는 소중한 존재다. 내가 심지도 않고 장소도 적절하지 않지만 잡초라니? 말도 안 된다. 돼지감자는 내가 심기도 하고 국화과 특유의 꽃이 아름답다. 그래도 2~3년 지나면 그 엄청난 번식력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6, 7월은 대한민국이 아름다운 시즌이다. 4월에는 벚꽃과 더불어 온갖 나무 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린다면 요즘은 키 큰 풀꽃들이 일제히 미모를 뽐낸다. 개양귀비, 큰금계국, 코스모스, 끈끈이대나물…. 이런 꽃들은 번식력도 좋아 어느 날 불현듯 내 텃밭까지 날아와 한 구석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내가 심지도 않고 텃밭이라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 내게는 감자 몇 알보다, 양배추 한두 포기보다 더 귀한 손님인 셈이다. 나는 작물 일부를 포기하고 애써 그들의 자리를 보전해 준다. 배척이 아니라 공존의 전략을 택한 것이다. 덕분에 내 텃밭에는 계절에 따라 윤판나물, 홀아비꽃대, 나도송이풀, 누린내풀 같은 보기 귀한 야생화들도 한자리씩 차지한다.

“농사는 잡초와의 싸움이 절반”이라고 했던가? 세상 사는 방법도 다양하건만 우리 인간은 오로지 싸움, 경쟁으로 환원하고 만다. 경쟁과 배척은 사람을 지치고 척박하게 만든다.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한 텃밭은 어딘가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싸우고자 한다면 모두가 적이겠지만 품고자 한다면 잡초도 꽃으로 보이는 게 또 세상일이다.

‘정원 잡초와 사귀는 법’의 저자 히키치 부부는 잡초가 있을 때 작물도 나무도 더 생생하게 웃는다고 말한다. 잡초는 토양 입자 사이를 넓혀 물 빠짐을 좋게 하고, 유기질을 만들어 미생물의 활동을 도와주고, 병충해를 유인해 작물을 보호해 준다. 큰비가 내릴 경우 토양이 유실되는 것도 막아 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잡초와 아름답게 공존해야 비로소 정원도 텃밭도 진정한 모습을 찾는다. 잡초가 있어야 텃밭도 사회도 건강해진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고추 순을 따다가 문득 털별꽃아재비, 개망초, 유럽나도냉이 같은 소위 ‘잡초’ 꽃과 눈 맞춤 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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