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의 마음 속 세상 풍경] [62] 만질 수 없는 명품 가방

윤대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2021. 7. 6.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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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상황에서 새로운 소비 행동을 경험하고 있다. 일반적으론 재해 상황에선 생필품 공급 부족에 대한 불안감에 ‘패닉 바잉(panic buying)’이 일어난다. 요즘은 명품 구매나 고급 음식점을 방문하는 소위 ‘분노 소비’ 행동이 이슈가 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명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명품 매장 앞에 길게 줄을 선 모습이 보도됐다. 상식적으로 코로나 전염에 대한 공포로 사람을 멀리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않은 시절이라 명품 소비가 줄어들 것 같은데,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셈이다. 대출받아 고급 음식점에서 분노 소비를 즐기는 인플루언서의 동영상도 인기다.

신조어인 분노 소비를 ‘퇴행’이란 심리 반응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지나치면 병적 퇴행에 의해 중독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적절한 수준의 ‘건강한 자아의 통제하에서의 퇴행(regression in the service of ego)’은 지친 마음에 잠시 쉼을 줄 수 있다. 모범생의 삶은 훌륭하지만 피곤한 면이 있다. 가끔은 나에 대한 통제의 끈을 잠시 풀고 조금은 유치하고 어린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음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한 방법이다. 적당한 분노 소비라면 잠시 현실을 잊고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의 가치에 나를 동일시하면서 잠시 불안정한 정체성에 위로를 주는 행동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명품 가방이 한 가상현실의 메타버스(metaverse) 플랫폼에서 500만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새로운 결의 소비 현상이라 느껴진다. 만질 수 없는, 오직 가상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가방의 가치가 고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메타버스 기술은 ‘디지털 치료제’라 불리는 새로운 치료 영역에도 접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 공포스러운 기억을 가상현실로 구현하여 점진적으로 스트레스 반응의 강도를 줄이려는 연구 등이 진행되고 있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마음의 기능을 ‘현실 검증력’이라 한다. 현실 검증력에 병적인 문제가 생길 때 환상을 현실로 믿는 ‘망상' 증상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 감동하는 것은 현실 검증력의 방어를 조금은 낮춰 가짜 현실에 몰입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마음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가짜 이야기라고 거리를 두고 본다면 감동할 수 없다.

팬데믹이란 현실의 스트레스 상황이 새로운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서의 또 다른 나, 즉 디지털 부캐(부캐릭터)를 통한 내 정체성의 충족감을 더 강하게 추구하게 되는 한 요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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