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섹스리스 청년들의 슬픔

김태훈 논설위원 2021. 7. 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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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리스(sexless)’

미국의 한 콘돔 회사가 세계 26국 성인 남녀의 성관계 횟수를 조사했다. 1위는 연평균 164회인 그리스였다. 2~3일에 한 번꼴이다. 최저는 연 48회인 일본이었다. 프랑스의 한 사회학자가 2018년 18세 이상 프랑스 성인 남녀에게 ‘섹스리스(sexless)’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더니 격앙된 반응이 돌아왔다. 응답자 거의 전부가 “불륜보다 더 나쁘다”고 대답했다. 일본은 아주 나쁜 나라인 셈이다.

▶일본에서 여성에게 관심이 없거나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은 남자를 ‘초식남’이라 한다. 남자에게 무관심한 여자까지 아울러 초식계(系)라 하는데,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일본의 초식 남녀 확산 배경엔 1990년대 이후 20년간 이 나라를 집어삼킨 장기 불황이 있다. 많은 젊은이가 취업난에 짓눌려 사랑을 포기했다. 태어나 한 번도 결혼하지 않는 생애 미혼율이 25%까지 치솟았다. 편의점 간편식 덕분에 독신으로 살아도 아쉬울 것 없고, ‘야동'과 자위 기구 도움 받는 게 주머니 사정에 어울린다는 판단도 ‘섹스리스 청년’ 현상을 부추겼다.

▶한국 성인 3명 중 1명꼴로 지난 1년간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특히 20대 남성 42%와 여성 43%가 섹스리스라는 통계는 장기 불황 시기 일본 청년들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 불투명한 미래가 주된 이유로 꼽히는 것도 비슷하다. 20대 대부분이 취업난에 허덕이다 보니 서로 사랑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출산·가사, 시댁과 맺은 관계 등 남자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는 여성이 전보다 자유롭게 비혼을 택할 수 있게 된 세태 변화도 한몫했다.

▶젊은 남녀가 사랑도 마음놓고 할 수 없는 현실은 2000년대 문학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원종국 단편 ‘용꿈’ 속의 청년은 집 없이 PC방을 전전한다. 간신히 여자를 사귀어 동거하지만 무일푼 청년을 탐탁잖게 여긴 여자의 엄마가 둘 사이를 갈라놓으며 남자는 원래의 고독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 청년에게는 사랑도 내 집 마련도 이룰 수 없는 용꿈이다.

▶육체 관계 없이 정신적 교감만 나누는 것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한다. 17세기 영국 작가 윌리엄 대버넌드가 ‘플라토닉 러버스’를 내면서 널리 퍼졌다. 정작 플라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육체·영혼·학문을 사랑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이 모든 것을 포함해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사랑으로 꼽았다. 플라톤이 환생한다면, 젊은이들이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를 몹시도 질책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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