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유동성 잔치는 끝났다

주춘렬 2021. 6. 3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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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통화 밀월, 900조원 급증
포퓰리즘 판쳐 나랏빚 눈덩이
집값 등 자산거품에 물가 들썩
부채 축소·구조개혁 서둘러야

2017년 9월 중순 정부서울청사 경제부총리 집무실. 문재인정부 초대 경제수장인 김동연 부총리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생일을 축하하며 깜짝 파티를 열었다. 당시 관가에서는 김 부총리와 이 총재의 브로맨스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참석했다. 원래 성장을 중시하는 기재부와 물가 안정을 책임지는 한은은 견원지간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두 기관은 한은법 개정을 놓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을 정도다.

문재인정부 들어 기재부와 한은이 유례를 찾기 힘든 밀월관계를 구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한은이 돈을 화끈하게 풀었다. 기준금리는 연 2% 아래에서 맴돌았고 2019년 7월 이후에는 네 차례나 인하되며 역대 최저인 0.5% 수준까지 낮아졌다. 유동성 지표인 광의통화(M2)는 문재인정부 출범 당시 2471조2000억원에서 4월 현재 사상 최대 규모인 3363조7000억원으로 900조원 가까이 불어났다. 2010년대 들어 한국경제에 저성장·저물가 기조가 굳어진 데다 코로나19 재앙까지 겹친 탓이 크다.
주춘렬 논설위원
재정정책은 ‘제동장치 없는 폭주 기관차’였다. 문재인정부는 해마다 경기를 떠받치기 위해, 때로는 선심성 퍼주기를 위해 팽창예산을 편성했고 이도 모자라 8차례 추가경정예산을 짰다. 이번 2차 추경까지 합치면 규모가 100조원을 훌쩍 넘는다. 나라살림은 안중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3년 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40% 안팎에서 관리하겠다”는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근거가 뭐냐”고 따졌다. 재정 금기는 맥없이 깨졌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현 정부 초 36%에서 올해 48.2%, 내년 52.3%를 거쳐 4년 후엔 61.7%(국회예산정책처 추정)로 치솟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가 2019년 기준 80.9%라지만 미국 등 기축통화국을 제외하면 54%로 뚝 떨어진다. 국가부도에 직면한 나라는 이 지표가 단기에 가파르게 올랐던 게 과거 경험이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 50%대에서 1년 후 160%대로 치솟았고 그리스와 스페인 등도 3∼6년 만에 두 배로 급증했다.

시중에 넘쳐나는 유동성 탓에 한국경제는 피멍이 들고 있다. 가계와 기업 모두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살림살이가 쪼그라든다. 가계와 기업 부채는 4226조원으로 전체 경제규모의 2배를 웃돈다. 이런 와중에 시중 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흘러들어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주식시장도 덩달아 뛰었고 가상화폐 시장까지 투기 광풍이 몰아쳤다. 잠잠하던 물가도 지난달 9년 1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뛰었다. 한은은 금융 불균형과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며 연내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한때 세계 최대 석유매장량의 부국이자 미인의 나라로 불렸던 베네수엘라는 대혼란에 빠지며 지옥으로 변했다. 지난 수년간 유가 폭락 탓에 재정이 거덜난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대신 무장한 조직폭력단이 수도 인근까지 장악해 국가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최근 6년간 국민 5명 중 1명(550만명)이 살인적인 인플레를 견디지 못해 해외로 떠났다.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20여년간 식량, 주택, 교육, 복지 등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공짜 보조금을 남발하며 무차별적인 재정 살포와 화폐 발행에 나선 게 화근이다.

얼마 전 우리 정부가 쏟아낸 부동산대책을 놓고 ‘대네수엘라’(대한민국+베네수엘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 상한제, 분양권 상한제와 같은 반시장 규제가 베네수엘라의 시장통제 정책과 닮았다는 지적이었다. 망국의 전조가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한은의 긴축 선언에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33조원대의 2차 추경을 편성하고 내년에도 확대재정 기조를 이어갈 태세다.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정부는 헤픈 씀씀이를 줄이고 기업과 가계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자구노력에 나서야 한다. 유동성 잔치는 끝났다.

주춘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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