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수치심 vs 불쾌감
[경향신문]
2018년 5월 A씨는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 뒷모습을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카메라 방향이 자신을 향한 걸 알아차린 피해자가 A씨에게 휴대전화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한 번만 봐달라”며 빌었지만 피해자는 신고했다. 불법촬영 혐의(성폭력처벌법 위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에게 1심은 유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은 달랐다. 무죄로 뒤집었다. 피해자가 느낀 감정이 ‘성적 수치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는 “기분이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진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두고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은 지난 1월 항소심 판단이 잘못됐다며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피해자가 성적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뿐만 아니라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 등 다양한 피해 감정을 포함한다고 했다.
수치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잘못한 이는 가해자인데, 피해자에게 ‘떳떳하지 못함’이 강요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성적 수치심을 다른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다.
대검찰청은 지난 5월 자체 훈령인 ‘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관리지침’에 규정된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변경한 바 있다. 최근에는 ‘아동학대사건 처리 및 피해자 지원 지침’에서 ‘피해아동의 수치심을 자극하는’을 ‘피해아동에게 불쾌감을 주는 등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으로 고치기로 했다. 이 밖에 ‘성매매알선 등 행위자에 대한 사건처리 지침’에 나오는 ‘여종업원’을 ‘성을 파는 행위를 할 사람’으로 바꾸는 등 각종 예규·훈령을 성평등 관점에 따라 개정하기로 했다.
국회에서도 여러 법률에 등장하는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를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기 위한 개정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권인숙 의원이 최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발의했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도 바뀔 것이다.
김민아 논설실장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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