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예술교육' 들여다보기..아비뇽 고등예술학교

17세기부터 이어져 온 프랑스의 예술 교육 역사
현재 전국적으로 총 50여 개의 국공립 예술학교 존재
프랑스 정부, 매년 졸업생들에게 예술 학사, 예술 석사 부여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 등 풍부한 문화 예술을 자랑하는 프랑스는 매년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품들을 찾는 방문객들로 붐빈다. 클로드 모네, 에드가르 드가, 에두아르 마네, 폴 고갱, 앙리 마티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프랑스 화가들이 남긴 발자취는 전 세계 예술가들의 발걸음을 이곳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의 모습 ©한지현
프랑스가 예술의 수도처럼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역사와 문화유산 덕분만은 아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프랑스만의 독자적인 예술 교육 체제 또한 그 명성을 드높이는데 한몫했다. 프랑스의 추기경이었던 쥘 마자랭(Jules Mazarin)은 소묘, 회화, 조각, 판화, 건축 등 다양한 매체에 재능을 지닌 학생들을 위해 1648년 처음으로 프랑스에 미술 아카데미를 세웠다. 이는 오늘날 프랑스 고등 예술 교육의 토대가 된다.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이 학교들을 정부로부터 분리시키며 에콜 데 보자르(L'École des Beaux-Arts)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예술인들을 양성하기 위한 다양한 장르의 전문 예술 학교가 생겨나게 됐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예술가 및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총 50여 개의 국공립 예술 학교가 존재한다. 한국의 예술 계열 학과가 보통 일반 대학 내 개별 학부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구분되는 시스템이다. 이 학교들은 문화부 감독 아래 공식적인 고등 예술 학교로 등록되어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된다. 학비는 300~600유로(원화 40~80만 원)로 저렴한 프랑스 국립대학 학비와 비슷한 수준이다. 전체 학생 정원은 각 학교의 규모에 따라 100명에서 600명 정도로 매년 적은 수의 학생만이 입학 자격을 얻는다.
소수의 정원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 개인의 관심사에 특성화된 맞춤형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프랑스 예술 학교의 장점이다. 교육에 있어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성이 우선이며, 교수와 학생들 간의 관계도 보다 수평적이다. 개개인의 역량과 관심사를 고려한 자유로운 소통 방식이 이 예술 학교 시스템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아비뇽 고등예술학교 보존-복원 과정에 재학 중인 학생의 졸업심사 전시 ©한지현
과거 모든 예술 학교들은 보자르 학교(École des Beaux-arts)라는 이름으로 통칭됐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라 더욱 폭 넓어진 예술 장르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2000년도부터는 고등예술학교(에꼴 쉬페리에르 다르, École supérieure d'art)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예술(Art), 디자인(Design), 사진(Photographe),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문화재 보존 및 복원(Conservation et restauration) 등 각 학교마다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제시하며 학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학생들의 졸업작품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는 심사위원 ©한지현
예술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학사 3년(Bac+3)에 달하는 DNA(Diplôme national d'art) 또는 석사(Bac+4)에 해당하는 DNSEP(diplôme national supérieur d'expression plastique) 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졸업을 위해서 학생들은 학년말 졸업 심사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심사를 통과한 학생들만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예술 학위를 받게 된다. 매년 6월, 프랑스 정규 학기가 끝나는 무렵이면 예술 학교 학생들은 졸업 작품 준비로 분주하다.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한 아비뇽 고등예술학교(École supérieur d'art Avignon, ESAA) 또한 학생들의 졸업 심사 준비에 한창이다. 아비뇽 고등예술학교의 전신은 1801년 아비뇽 보자르 학교(École des beaux-arts d'Avignon)로, 프랑스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예술 학교 중 하나다. 현재는 예술 창작(Création) 과정과 문화재 보존-복원(Conservation-restauration) 과정이 존재한다. 올해 두 과정을 마치는 학사 3학년(Bac +3)과 석사 2학년(Bac +5)에 해당하는 학생은 약 20여 명이다.

◆심사위원 앞에서 졸업 작품 발표 중인 아비뇽 고등예술학교 학생 ©한지현
졸업 심사는 20분간의 발표, 15분간 심사위원과의 질의응답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발표 형식은 자유롭게 백지로 던져진다. 전시를 비롯해 영상부터 퍼포먼스, 음악까지, 학생들은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3년간의 고뇌와 노력의 작업 과정이 온전히 작품 속에 묻어나는 순간이다.

◆아비뇽 고등예술학교 강당에서 진행되는 졸업심사 모습 ©한지현
심사 장소 또한 학생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강의실, 대강당, 도서관, 학교 복도 등 학교의 모든 공간이 발표 공간이 된다. 주제에 따라 도심의 전시 공간이나 미술관이 심사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중에는 화장실 공간을 활용해 사진 전시를 준비한 학생도 있고, 어둠의 공간에서 설치 미술 전시를 기획한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은 동료들이 졸업 발표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작품을 함께 옮겨주거나 심사 내내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기도 하며, 때로는 동료의 퍼포먼스 속 배우를 자처하기도 한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졸업 발표가 끝나고 나면, 학생들은 심사위원과 교수진,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수년간 학업 과정의 결실을 맺는 학위 심사를 마친다.
한국과는 다른 프랑스만의 예술교육 환경과 고등예술학교 시스템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아비뇽 고등예술학교의 교무처장을 맡고 있는 라파엘 망시니(Raphaëlle Mancini) 씨를 만나봤다.
Q.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프랑스만의 예술 교육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문화예술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국가 차원에서도 지역 차원에서도 문화예술을 부흥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교육(Éducation Artistique et Culturelle, EAC)은 초등학교 과정부터 필수 교육으로 지정돼 있다. 어릴 때부터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자주 접할 기회를 제공하면서 예술을 통해 아이들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증진시키고자 함이다. 고등 예술 교육의 경우 학생들이 개개인의 예술적 역량을 향상시키고 예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역별, 학교별로 특성화되어 있다. 예술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문화예술기관과 교육기관 사이의 협업도 잦은 편이다.
Q. 그렇다면 아비뇽 고등예술학교는 어떤 특성화된 교육을 제시하는가?
전국 약 50개의 고등예술학교를 중심으로 각 지역별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국공립예술학교 네트워크(École du sud) 안에는 아비뇽을 비롯해 액상프로방스, 아를, 마르세유, 모나코, 니스, 뚤롱까지 총 7개 고등예술학교가 포함돼 있다. 이 학교들은 사진, 디자인, 복원 등 서로 다른 전문성을 지니고 있으며, 지역 예술학교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상호보완하며 각 기관의 교육을 특성화시켜 나가고 있다.
아비뇽 고등예술학교는 예술을 교육하는 교육 기관이기도 하지만, 지역 내 공공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 협력 공공 기관(Établissement public de coopération culturelle, EPCC)이기도 하다. 문화부와 아비뇽 시의 공동 감독과 지원 아래, 학사 과정(Bac+3, DNA)과 석사과정(Bac+5, DNSEP)을 통해 지역의 문화유산이나 문화자원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특히 문화재 보존-복원 과정은 프랑스 전역에서 단 4개의 기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교육과정이다. 해당 기관으로는 파리 1대학, 투르-앙제-르망 고등 예술디자인학교,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리고 아비뇽고등예술학교가 있다. 아비뇽은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다리, 아비뇽 페스티벌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 중 하나다. 덕분에 지역에 위치한 여러 문화예술 기관들과 협업해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Q. 아비뇽 고등예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어떤 교육을 이수하게 되는가?
입학 지원 시부터 학생들은 원하는 관심사에 따라 의무적으로 보존-복원 또는 창작 과정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지만 1학년 때는 모든 학생들이 과정 통합 수업을 받는다. 이는 각 특성화 과정 실무 수업 이전에 모든 학생들이 예술 철학, 예술사, 문화인류학 등 이론적인 토대를 다지고, 소묘, 크로키 등 창작을 위한 기초 기술들을 습득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함이다. 사진, 영상, 연극 등 다양한 아틀리에들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2학년부터 보존 복원 및 창작 과정에 특성화된 수업을 받게 된다. 학생들이 점진적으로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단계적인 교육 과정이 고안돼 있다.
Q. 고등예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량을 갖춰야하는가?
고등예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입학시험인 콩쿠르(Concours)를 필수로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각 학교의 특성화 방향에 따라 시험의 형식과 절차는 달라진다. 그래서 프랑스 고등예술학교 입학을 준비한다면, 먼저 원하는 학교의 입학 요건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지원자 역량으로는 예술에 대한 확고한 자기만의 철학과 방향성이 있다. 예술 철학 및 예술사 등 문화와 예술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방면에서 지식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
아비뇽 고등예술학교의 경우, 지원자들의 사고력과 예술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제시하고, 제출된 답안을 토대로 면접을 진행한다. 면접 중에는 문제와 답변에 대한 지원자의 이해와 성찰을 점검하는 질문들이 오간다.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나면, 지원자들은 지원 과정과 관련된 이전 작업 및 활동들을 발표한다. 이 두 과정을 통해 매년 40명 가량의 학생들이 선발된다.
Q. 고등예술학교 졸업 후, 학생들은 어떤 진로를 선택하는가?
보존 복원 과정의 졸업 진로로는 보존 복원 전문가, 미술관 또는 예술센터 내 작품관리원, 보존 복원 책임 담당자 등이 있다. 창작 과정의 경우 독립 예술가 또는 기관 소속 예술가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 교육 전문기관이라고 해서 예술가만 양성하는건 아니다. 졸업한 학생들이 예술센터, 미술관를 비롯하여 지역의 문화예술 축제 및 다양한 형태의 문화예술 기관에서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졸업 후 진로 방향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프랑스 아비뇽 = 한지현 글로벌 리포터 80029@naver.com
■ 필자 소개
프랑스 아비뇽 대학교 (Université d'Avignon) 문화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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