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낙인' 숨죽인 73년..진상규명·희생자 명예회복 '첫발'

안관옥 2021. 6. 29. 23:1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더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여순사건 유족인 황순경(83)씨는 29일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명예회복위원회는 신고된 진상규명 사건을 조사한 뒤 사망자·행방불명자·후유장애자·수형자 등을 희생자로 인정하고, 희생자의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 형제자매, 제사를 모시거나 무덤을 관리하는 4촌 이내 혈족을 유족으로 결정한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별법 따라 명예회복위 설치
1년간 신고받고 2년간 조사활동
희생자 인정땐 지원금, 유족은 제외
평화인권재단 설립 조항도 빠져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좌우충돌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오늘은 어머니가 더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여순사건 유족인 황순경(83)씨는 29일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씨는 “그 엄청난 사건 이후 실성한 듯했던 어머니는 평생 ‘억울한 영혼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되뇌다 돌아가셨다”며 회한에 잠겼다.

그의 어머니 우경옥(71살에 작고)씨는 45년 일제 강제노역에 끌려갔다 만신창이로 돌아온 남편을 떠나보냈다. 이후 3년 만에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여순사건에 휘말려 23살 아들과 25살 동생을 사흘 간격으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순천의 경찰관이었던 동생 우종헌은 그해 10월21일 장대동 다리 위에서 14연대 병력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여수의 철도원이었던 아들 황순헌은 그해 10월24일 미평역 부근 철길로 퇴근하다 진압군의 총격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좌우 양쪽에서 겨눈 총부리에 소중한 혈육을 잃은 우씨는 이후 5개월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말조차 잃어버렸다고 한다. 9살 때 전남 여천군 쌍봉면 여천리 내동마을 고향 집에서 비극을 목격한 황씨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가족 모두가 엉엉 울고 또 울었다”고 회상했다. 황씨는 “그 이후가 더 참담했다. 총을 쏜 누구한테도 항의할 수 없었다. ‘빨갱이’나 ‘반역자’로 낙인이 찍힐까봐 오히려 숨을 더 죽여야 했다”고 한숨지었다. 황씨는 비극을 삭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해원의 순간을 간절하게 꿈꿔왔다.

29일 오후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권오봉 여수시장이 전남 여수시청 대회의실에서 유족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여수/연합뉴스

황씨 같은 유족들이 무고한 희생의 진실을 규명하고, 죽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추모할 수 있는 길이 드디어 열렸다. 사건 발생 73년 만이다.

국가는 특별법에 따라 명예회복위원회와 실무위원회를 설치하고, 피해자와 유족 등은 여순사건 당시 억울한 피해를 신고받게 된다. 명예회복위원회는 신고된 진상규명 사건을 조사한 뒤 사망자·행방불명자·후유장애자·수형자 등을 희생자로 인정하고, 희생자의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 형제자매, 제사를 모시거나 무덤을 관리하는 4촌 이내 혈족을 유족으로 결정한다.

신고 기한은 명예회복위 출범부터 1년 안이고, 조사 활동은 2년 동안 이어진다. 구체적인 신고 기한과 조사 일정 등 절차는 연말께 만들어질 시행령에 담길 전망이다.

희생자로 인정되면 국가에서 지급하는 의료·생활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피해를 본 사망자·행방불명자·후유장애자·수형자 등 희생자 중 생존자는 거의 없다. 희생자 유족은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순천·여수·광양·구례·보성·서울 등지에 꾸려진 유족회에서 활동 중인 유족은 1500여명이다.

신고와 조사 이후 유족의 수는 1만명 안팎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유족들은 활동의 구심이고 기념의 주체라 여겼던 평화인권재단의 설립조항이 특별법에서 제외되자 “핵심이 빠졌다”고 서운함을 내비쳤다.

유족들은 “제주 4·3의 경우 2000년 특별법을 제정한 뒤 12년 동안 5차례 신고를 받아 유족 5만9225명, 희생자 1만4231명이 인정을 받았다”며 “우리는 배상·보상이나 지원금보다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한 국가의 진정한 사과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