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바캉스: 절대 부동의 고요까지

한겨레 2021. 6. 2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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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언어탐방]휴가라는 삶의 틈새에서 진짜 즐거움을 주는 '최고의 휴식'은 어떤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최고의 휴식은 신(神)의 쾌락을 흉내 내는 것이리라. 신은 부동의 쾌락을 즐기는 존재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 세상 만물이 살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신적 쾌락은 '부동의 고요' 속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명상이나 면벽수도 등으로 신적 쾌락을 모방하고, 몰입하는 기도의 순간에 신적 황홀경을 공유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ㅣ철학자

여름이 왔다. 이와 함께 온 말이 있다. 바캉스다. 우리말 외래어의 상당수는 영어에서 온다. 그래서 프랑스어에서 온 바캉스란 말이 유난히 반갑다. 그것을 일년 내내 기다려온 터라 그런지 많은 사람이 즐겨 쓰고, 혼성 파생어도 곧잘 만들어낸다. 집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뜻으로 ‘홈캉스’라는 말도 있고, 호텔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의미로 ‘호캉스’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우리말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으나, 언어 수용력과 창조력이 뛰어난 우리말의 장점이라고 변명해보자.

통상 복수형으로 쓰는 ‘바캉스’(vacances)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일자리를 비우다’라는 의미이고, 종종 ‘집을 비우다’라는 뜻도 된다. 여름 휴가철이면 집을 떠나 바닷가로 산으로 호숫가로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미국식 영어도 있다. 바로 베케이션(vacation)이다. 복고풍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1960년대를 풍미했던 코니 프랜시스의 노래 ‘베케이션’을 다시 들어보고 싶을지 모르겠다. ‘비-에이-시-에이-티아이오엔’(V-A-C-A-TION), 닿소리와 홑소리를 딱딱 끊어 발성하며 시작하는 노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 듣기 실력이 형편없던 나도 “한여름 태양 아래 베케이션”이란 가사가 똑똑히 들렸던 기억이 난다. 두번째 소절은 더 잘 들렸다.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집어 던지고, 학교로부터 해방이다!”

1970년대 초에도 프랜시스의 노래는 여름철이면 유행했는데, 그땐 대학생이던 내게 “모래밭에 엎드려 러브레터를 쓸 거야”라는 소절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가사에서 용기를 얻어 ‘그녀’에게 연애편지를 썼고, 친구를 위해 구애의 편지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역시 공동 작업한 편지가 효과를 봐서 남 좋은 일 했는데, 그런 ‘사건’은 평생 고운 추억으로 남는다.

프랜시스의 가사에서 나이가 들수록 더 오래 남았던 것도 있다. “한여름 밤 별빛 아래에서”라는 소절이다. 여름방학에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한없이 은하수를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밤의 길이는 천문학적 수치를 갖게 되고, 그 밤의 마당은 모든 것을 배제하는 독립적인 공간이 되었다. 내게 타임머신을 타고 여름휴가를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50여년 전의 시골집 앞마당으로 갈 것이다.

오늘도 일년에 한번 찾아오는 바캉스 철 휴가는 모든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동시에 또 다른 ‘일거리’를 주는 것도 현실이다. 휴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휴가를 보낼 곳도 보내는 방법도 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선택은 항상 난제이다. 역사적으로 ‘계획된 여름휴가’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노동 체제의 산물이다. 휴가를 가는 것도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인 ‘유도된 필요성’이 되었다. 자연스레 휴식의 욕구가 발동해서가 아니라, 휴가 기간과 방식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필요에 따라 휴가를 간다. 그래서 종종 ‘휴가 활동’을 하느라 휴식을 못 하는 아이러니를 겪기도 한다.

물론 아직도 여름철 바캉스는 일정 규모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바캉스가 남의 나라 이야기인 사람이 여전히 적지 않다. 안타깝다. 그들에게는 사실 ‘일상의 휴식’도 오롯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아주 옛날에도 이상향을 설계하는 사람은 일상의 휴식을 행복의 기본 조건으로 삼았다. 500여년 전 토머스 모어가 설계한 ‘유토피아’에서는 하루 6시간 노동한다. “정오까지 세 시간 일하고,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는다. 점심 후에 두 시간 쉬고 나서, 다시 세 시간 일한다.” 경우에 따라 노동시간을 더 줄여 자유를 더욱 보장하기도 한다. 이런 일상의 휴식이 보장된다면, 여름철 바캉스도 필요 없지 않을까.

이렇듯 모든 생명체에게는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휴식이 필수이다. ‘쉴 휴’(休) 자는 ‘사람 인’(人)과 ‘나무 목’(木)의 결합으로 ‘나무 아래에서 쉬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나무 위에서 쉬는 원숭이는 어떨까. 동물행동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원숭이도 간혹 나무에서 떨어진다. 언제? 졸거나 잘 때다. 제대로 휴식하지 못해서 졸거나, 너무 늘어지게 휴식을 즐기다 그런 ‘실수’를 한다고 한다. 어느 경우나 휴식과 밀접하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바캉스를 즐긴다. 그렇다면 휴가라는 삶의 틈새에서 진짜 즐거움을 주는 ‘최고의 휴식’은 어떤 것일까. 철학자들도 이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최고의 휴식은 신의 쾌락을 흉내 내는 것이리라. 신은 부동의 쾌락을 즐기는 존재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 세상 만물이 살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그런 세상을 그저 바라보며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신적 쾌락은 ‘부동의 고요’ 속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신체의 움직임 없는 명상이나 면벽수도 등으로 신적 쾌락을 모방하고, 몰입하는 기도의 순간에 신적 황홀경을 공유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보통 사람들의 쾌락은 활발히 움직이는 데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노래 부르고 춤추며, 운동하고 시합하거나, 이동하며 관광을 즐기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에 더해 ‘오락 활성화 사회’의 특징을 확고히 한 디지털 스마트폰 시대에서는 오감을 총동원하여 온갖 활동을 한다. 파스칼도 인간의 활동성에 주목하면 인간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이 하는 행동들은, 모두 일일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오락 또는 심심풀이의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은 소란스러움과 활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옥살이가 매우 두려운 형벌이 된다”라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인간은 말로는 진심으로 휴식을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 활동을 추구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사회의 휴가 활동을 미리 내다본 듯하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야 보통 사람이 절대 부동의 고요에서 휴식의 즐거움을 찾기란 너무 어렵다. 다만 가끔 짧게 시도해볼 수는 있다. 그래서 바캉스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귀띔을 하나 할까 한다. 휴가를 잘 즐기는 방법은 그 순간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자유를 만끽하면 좋다. 다만 며칠간의 휴가 가운데서 단 하루를 유보해 바캉스의 원래 뜻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모든 것을 비우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휴가 기간이 짧다면 반나절도 좋다. 의외의 효과를 얻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비워지는, 자신이 곧 바캉스가 되는 최고의 휴식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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