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칼럼] 지켜져야 할 '인천산선'의 역사

한겨레 2021. 6. 29.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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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칼럼]그 건물들에 스며 있는 사연을 설명하며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더니 한 참석자가 말했다. "그럼 그 공단에 있는 기업의 사장들이 모여서 식사하던 건물, 차를 마시며 골프 약속을 하던 건물들도 모두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합니까?"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딱 그 정도이다.
1970년대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건물 앞의 조화순 목사(맨 오른쪽)와 최영희 전 의원(왼쪽에서 두번째).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제공

하종강ㅣ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 도시의 문화유산을 지정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경제성장의 상징인 그 도시의 공업단지에서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이 저녁마다 모여 머리를 맞대고 야학을 진행했던 건물, 공단 노동자들에게 정신적 양분을 공급하고 저녁마다 활동가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기도 했던 작은 서점이 들어서 있던 건물, 노동운동사적 의미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동맹파업을 벌였을 때 노동자들이 모여서 며칠 동안이나 파업을 준비했던 건물들이 용도만 바뀐 채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건물들에 스며 있는 사연을 설명하며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더니 한 참석자가 말했다. “그럼 그 공단에 있는 기업의 사장들이 모여서 식사하던 건물, 차를 마시며 골프 약속을 하던 건물들도 모두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합니까?” 또 다른 참석자가 말을 보탰다. “좀 공평하게 합시다.”

우리나라의 놀라운 경제성장이 상당 부분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능했거늘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반납한 채,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희로애락을 겪었던 공업단지에서 노동자 땀방울이 밴 건물들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과연 노동자 편향적인 것인가? 다른 곳도 아닌 공업단지에서….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딱 그 정도이다. 그날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부끄러워 한밤중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야 했다.

일찍이 고등학생 시절부터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인천산선) 건물에 들락거렸다. 이웃 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같이 14년이나 전통을 이어온 독서동아리였지만 학교 밖에서 은밀히 모여야 했고 수소문 끝에 구한 장소가 ‘인천산선’ 사무실이었다. 초가집 건물의 판자문을 열고 들어서면 흙먼지가 이는 바닥에 철제 책상과 캐비닛들이 놓여 있었다. 사무실을 왜 초가집에 마련했을까? “선교 대상과 같은 위치에서 생활하고 활동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실무자들은 동네 주민들과 비슷한 수준의 주택에서 생활했고 사무실도 위화감이 없도록 그 동네 평균적 수준의 건물에 마련한 것이다. ‘한국 위장취업자 1호’라는 조화순 목사님이 동일방직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했던 것도 같은 취지였다.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과 ‘같아지는’ 것이었다.

1970년대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건물. 초가집 건물 안으로 흙먼지가 이는 바닥에 철제 책상과 캐비닛들이 놓여 있었다.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제공

초가집은 나중에 이층 양옥으로 개축했고 그 건물에서 한국 7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방직뿐만 아니라 삼원섬유·한국기계·대성목재·반도상사·이천전기 등 숱한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이 온갖 풍상을 겪었다. 조화순·황영환·이총각·김근태·최영희·인재근·조옥화 등 우리나라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민주 인사들을 배출했다. 사회운동에 첫발을 디디며 4년 남짓 그곳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부대낄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내 인생에 신이 내려준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공개적 사회운동 단체가 단 하나도 없었던 시절, 참여연대·경실련도 없었고 민주노총과 같은 조직은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암흑의 시대에 그 건물은 군부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의 근거지였다.

그 유서 깊은 건물이 40층 아파트 3천여가구가 들어서는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와 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이 재개발이라는 경제적 이익 앞에 무참히 무너지고 있는 형국이지만, 경제적 가치를 따진다 해도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인천산선’과 동일방직 건물을 잇는 지역 일대를 노동박물관으로 개발하면 향후 100년 이상 우리 자녀들의 ‘밥벌이’가 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식견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안정윤 학예연구사의 조사에 따르면 덴마크 코펜하겐 노동회관에 설립한 국립노동자박물관, 스페인 카탈루냐 직물공장에 마련한 국립과학기술박물관, 스웨덴 홀멘 섬유공장에 꾸민 국립노동박물관, 영국 더원트계곡의 방적공장, 핀란드 벨라의 제재·판지공장, 일본의 도미오카 제사공장 등 노동자 문화유산이 지역 경제에도 큰 보탬이 되는 성공적 사례는 무수히 많다. 서울의 영등포구청이 민주화운동·노동운동의 산실인 영등포산업선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노동역사박물관과 북카페 등을 구비한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설립하기로 한 것도 그러한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인천산선’ 건물에서 영욕의 시절을 보낸 김정택·김도진 목사는 건물 존치를 요구하며 여드레째 단식 중이다. 그 건물이 헐리도록 방치함으로써 미래 세대의 자녀들에게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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