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주머니를 텅 비워버린 재벌출신 그사람

한겨레 2021. 6. 2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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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채현국 선생님. 사진 강재훈 기자

스승의 은혜/강소천

1.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2.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은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3. 바다보다 더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 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이름 잘 지어야지 강소천 선생은 1915년에 태어나서 1963년 48살에 소천(召天: 개신교에서 하느님께서 불러간다는 뜻으로 죽음을 의미한다)하셨다. 그래도 염라대왕이 많이 봐주신 것이다.

요즈음 들어 내가 아끼고 존경하는 분들 가운데 여러분이 가신다. 나와 가까운 효암학원 박종현 전 교장이다. 채현국 할배가 이사장으로 있는 개운중학교 교장이었다. 채현국 할배의 수제자격이었다. 나와의 관계는 거의 비서격이었다. 갑자기 나보다 앞섰다기보다는, 채현국 영감님보다 먼저 죽었다. 그후 이어서 또 똑같은 수제자격인 이희종 선생도 앞서갔다. 박원순 시장, 백기완 선생, 또 일본에 계시면서 화장재로 귀국하신 정경모 선생, 바로 3월 말에 나를 적극 도와주셨던 권오경 노인께서 97살에 가셨다. 또 우리 마을에 이사와 사는 돌쑥이라는 홍성배도 50대에 먼저 갔다. 이어서 4월 2일 채현국 건달할배가 주무시다가 깨어나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 할배는 오래전부터 내가 경상도만 가면은 어느 곳이든 찾아오셨다. 상주 가면 상주로, 부산 가면 부산까지 심지어 남해에 갔었는데, 그곳도 경상도라고 찾아오신다. 처음 만나 첫인사 때부터 태어나신 신분을 밝히시는데 너무나 놀랍고 떳떳하셨다. 서자로 태어나셨으나 형님이 자살하시고, 적자가 아니지만 적자역할을 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일제 때 중국서 금광을 하셨고, 8·15 이후에 탄광을 하시게 된 것이다.

탄광이란 막장이다. 노동자들이 힘들지만 농업노동자들보다는 건축노동자가 조금 쉽고, 아주 힘든 노동은 배 타는 어부들이다. 옛날에는 양반놈들이 뱃놈들이라고 했다. 그래도 어부들은 햇빛도 보고 비바람이라도 맞고 지내지만 광부들은 빛도 바람도 비도 맞을 수 없고 공기마저 광물질을 품고 있어 막장이다. 이곳이 도피 생활하는 이들이 숨어 살기 좋은 곳이다. 그때 70년대 민주화운동하다 수배되면 피하러 들어간 곳이 광산이었다. 우리나라 전 국민이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다가 무연탄이 나오면서 고급연료가 되었다.

석탄 산업이 개발되면서 70년대 초에 그가 낸 세금이 전국에서 2위였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대주면 세금을 1위로 내도록 기업을 더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는 그 제안을 거부하셨다.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하는 일에 협조 안 하면 기업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망할 것은 뻔한 일이고, 미리 정리하자고 흥국탄광이란 광업소를 정리하게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당시 광업소에 있었던 사람들 똑같이 나누어주었어.” 가령 지배인들은 많이 주고 일용근로자는 쬐끔 준 것이 아니고 같이 나누어 주었고, 갈 데 없는 이들은 함께 살도록 공동협업농장을 만들어서 정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지난해 만났다. 나보다 1∼3년 더 아래인 나이였다. 채현국 이사장의 호칭이 사장님, 이사장님이 아니고 그냥 형님이라 부른다. 지금은 이상할 것도 없으나 70년대에 형님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신분차별을 일찍이 깨신 분이라는 의미다. 다행히 지난해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물어보았다. “그때 탄광 정리하시고 재산 나누어 준 사람이 몇 명쯤 되었어요?” “천명에서 몇십 명 빠져 구백칠·팔십 명 될 거야.” 여기까지가 1차 재산분배였다. “내가 한 푼이라도 챙기면 박정희가 놔두지 않아. 회사 돈 빼돌렸다고 덮어씌우니까 한 푼도 안 챙기고 다 나누어주었어. 그것도 사무원들 시켜서.”

그 할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오늘 주머니에 있는 돈 내일까지 가면 안 된다고 밤 9시만 넘으면 주머니 정리하신다. 몇만 원이 있든 몇십만 원이 있든 돈을 다 꺼내서 나누어주신다. 10만 원 남았으면 10명이서 1만 원씩 나누어주신다. 9명이면 나는 2만 원 주시고, 2만 원씩 나누어 줄 때면 나는 5만 원 주신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나는 언제나 배로 주셨다. 그것은 내가 가난하고 비참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나누어주다가 프랑스에 있는 딸이 주었다는 프랑스화폐 1,000프랑 지폐를 꺼내셨다. 그 당시 우리 돈으로 100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이 돈은 임 목사 주는데, 다음에 꼭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돼. 안 갚아도 되고.” 이 돈은 받아서 쓸 수가 없었다. 수첩에 가지고 다니다가 유럽에서 유학하는 학생에게 주었다. “너 졸업하고 교수되면은 꼭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방법으로 갚아야 한다.”고 전달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며칠 후 할배 만나서, “저 지난번에 주셨던 돈 같은 방법으로 유학생에게 전달했어요.” “내가 그랬던가?…”

양산 개운중학교서 건강교실을 하면은 매 기마다 한시도 빠지지 않고 강의를 들으신다. 말 같지 않은 말을 말씀처럼 듣고 계시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나는 국민학교 졸업장이 최고학력이고, 그 할배는 그 당시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이셨다. 언젠가는 식사 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느 분께 전화를 하신다. “야, 순재야! 너 임락경 목사님 아느냐?” “잘 모른다.” “야 임락경 목사님을 모르고 살면 어떻게 사느냐. 지금 전화 바꾸어줄 테니 통화해라.” “여보세요, 이순재입니다.” “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임락경이에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알아서 종종 알고 지냅시다.” “네, 고맙습니다.” 이순재 그분이 서울대 철학과 동기란다.

몇 년 전 일이다. 병원에 입원하셨다. 문병 오지 않는다고 전화가 연속 온다. 마침 같이 있던 김환기와 함께 갔다. 문병객이 줄을 선다. 대통령이 화환을 보내고, 박원순 시장이 문병을 다녀가고, 병실에서 10분도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내가 돈 욕심이 없는데, 이제는 비자금을 좀 모아야겠어.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뺏어야겠어. 그 돈 은행에 두면은 은행 자체만 키워주니 각자 은행을 만들어야겠어. 한 사람에게 100만 원씩 맡겨놓았다가 내가 필요할 때 한 번에 찾아 써야겠어. 100만 원씩 만 명에게 저축해놓으면 100억 가지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하고서 함께 간 김환기에게 “내 돈 좀 맡고 있어. 아무 때라도 내가 주라고 하면 30일 안에 주어야 돼!” “저 못 맡아요. 주면 써버리고 금방 못 챙겨드려요.” “괜찮아 좀 늦어도 돼. 없으면 안 줘도 돼.” “임 목사는 2천만 원을 맡겨야 하는데,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 “15분만 기다렸다가 가.” 어떤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돈을 보내라고 하셨다. 15분 후에 100만 원을 찾아다 주신다. “우선 100만 원만 맡고 있어요. 다음에 2천만 원 채워드릴게.” 그리고 일천구백만 원을 안 맡기고 가셨다. 우리 집에 계실 때 할배의 딸과 사위가 왔다. 할배는 사위에게 “야, 돈 좀 맡고 있어. 아무 때라도 주어야 한다.”고 하신다. “네.” 몇 달 후 딸과 사위가 지리산 실상사에서 하고 있는 건강교실에 참석했다. 할배 사위에게 물었다. “너 그때 장인이 돈 얼마 맡기시더냐?” “백오십만 원 주시던데요?” “야, 나는 이천만 원 짜리다.” “아버님이 가족들에게는 무척 짜게 대하셔요.” 병원에 계실 때 아들이 들어온다. “야, 돈 좀 주고가라.” “진작 말씀하셨으면 오는 길에 은행에서 찾아오지요.” “괜찮다. 네 어머니가 가져오신다.” 여유 있는 아들 돈은 찾아다가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맡기고, 돈 있는 사람은 문병 오는 사람마다 돈을 달라고 하신다. 몇 개월 지난 후 우리 집에서 지금까지 저축해 놓은 돈 찾아서 또 저축하셨느냐고 했더니, “내가 도와 준 사람들에게는 한 사람도 도와달라고 안 했어. 혹 모르고 달라고 했을런지는 몰라.” 물론 1000명 정도에게 그 당시 집 한 채 값 정도 되는 돈들을 주었으나 다 기억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

필자 임락경 목사

병원에 문병 가면은 문병 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는 친교의 장이기도 하다. 식당 겸 술집을 정해놓고 문병 오는 사람들에게 병실이 좁으니까 식당으로 가라고 한다. 하루종일 문병객들이 몇 시간씩 안 가고 먹고 마시고 하는 술값을 저녁 8시에 돌림의자 타고 내려오셔서 모두 계산하신다. 그리고 그중에 돈이 많은 사람을 지명해서 “나머지 술값은 네가 내.” “네, 걱정 마시고 가셔요.”하고서, 그 사람은 집에 못 가고 아침까지 술대접해야 한다. 문병객들 중에는 서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처음 만난 사람들도 있다. 술을 먹다보면 안주를 더 시켜야 되나 술을 더 시켜야 되나 서로 눈치 볼 때 술값 나머지 맡은 사람이 아침까지 부족함 없이 챙겨준다. 또 그 장소에는 박종현, 이희종이 아예 밤새 지키고 있으면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안내해주고 처음 만난 사람 인사시키고…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게 된다. 그 할배의 작품이 아니고 지인들이 이름 있는 이들의 그림이나 글씨 또 물품을 닥치는 대로 기증받아 전시회를 열었다. 그 작품이나 출품한 전시품을 팔아서 노인네 말년에 좀 쓰시도록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시작하는 날 밤에 시간 맞춰 참석하려고 계획 없이 갔다. 기념식 축사는 이부영 전 의원 한 사람이었다. 내가 참석하니 나에게도 축사를 부탁하신다. 먼저 이부영 의원이 축사를 하는데, 웅성웅성 조잘조잘 왁자지껄 축사는 들리지 않는다. 그다음 내 차례다. 이제는 더 시끄럽다. 나는 축사 안 하고 조용하기를 기다린다. 5분, 10분 지나니 더 떠든다. 사회자인 이희종이 “왜 축사 안 하시느냐?”고 한다. “들을 사람들이 들어야 하지. 혼자 정신병자처럼 떠드느냐? 안 하고 그냥 가련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지금 축사 시간입니다.” 그래도 더 시끄럽다. 갑자기 할배가 큰소리로 “조용히들 해. 뭐 하러 왔어.” 그러니 잠잠해진다. “축사하기 전 내가 강원도서 아랫것으로 농사꾼입니다. 내가 축사하는 것 물론 들을 것도 없어 떠드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방금 전 국회의원이셨던 분이 축사하실 때도 떠드는 것을 보니 그것은 여러분들의 잘못입니다. 안 하고 그냥 가고 싶었으나 조용해지니 축사를 시작하렵니다.” 그리고 뭐라고 지껄였다.

전시회 장소는 그림 글씨 전시보다는 뒤풀이 장소다. 인원이 너무 많아 식당을 두 군데로 나누었다. 제주도에서 온 병원 원장과 같이 앉았다. “그림 하나 찝어서 사려고 하니 5천만 원이래요. 그래도 사려고 했더니 벌써 누가 샀대요. 그래서 삼천만 원짜리 하나 샀어요.” 하는 정도다. 전시회는 15일 동안 연속이었다. 저녁마다 회식판이다. 술값은 언제나 영감님이 모자를 돌린다. 그러면 술값은 해결된다. 전시회 끝나고 모아진 돈 영감님 쓰시라고 드렸더니 가난한 문인들 모두 나누어주시고 끝이다. 다시 한번 더 하자고 그때 출품 못 했던 작품들 모아서 두 차례 했으나 모두 문인들 나누어주시고 끝이다.

숲학교의 구상과 계획을 하신다. 지리산 밑에 토지를 구입하셨다. 정년퇴임한 박종현 전 교장과 김환기와 같이 시작하려고 오래 전부터 구상을 하셨고, 위치와 물자리 보고 진행하려다가 박종현이 먼저 죽었다. 그래도 몇 년 지났으니 다시 진행하려고 했었다. 이번 1월 27일 안동에 사는 차명숙에게서 전화가 온다. 채현국 할배가 배탈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신다고. 내가 배탈 멎는 약이 있어 가지고 간다고 시간약속을 하였다. 할배 집 앞 찻집에서 뵙게 되었다. 그날은 마나님과 같이 나오셔서 차도 마시고 웃기도 하시고 점심대접 잘 받았다. 헤어지기 아쉬워 다시 찻집에 들어가서 나눈 주된 이야기가 지리산 숲학교 이야기였다. 그 땅이 학교재산으로 돼 있어서 속히 이사회를 열기로 했다. 이사회 결과는 학교서는 학교숲에 뜻이 없고, 그 땅은 숲학교 운영진을 따로 꾸려 경매로 사야 된다는 것이 회의 결과다. 그럼 채현국 전 이사장님 더러 사주시라고 해야 된다. 물론 이사회 결과는 할배에게 전달했다.

그 무렵 병원에 입원하셨다. 유행성 독감 때문에 면회를 못 하고 지냈다. 4월 1일 퇴원하셨고, 집에 오셔서 4월 2일 주무시다가 너무 오래 주무셔서 들어가 보니 계속 주무시고 안 일어나신다고 한다. 지금도 주무신다. 장례식장에서 그처럼 편히 갈 수 있다면 나도 지금 선택하겠다고 하니 옆에 있는 젊은이들이 딸 결혼식이 있으니 안 된다고 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곳, 빨리 잊고 편히 가시도록 보내드려야겠다.

글 임락경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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