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빨갱이 그림' 오해는 그만
신천 대학살 모티브 '통념'과 달리
연구 보면 선후관계 맞지 않는데
색깔 논란 여전..이제 오해 풀 때
“믿기지 않아요. 한국에서 이 그림을 보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국내 미술사학계에서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정영목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는 말했다. 그 작품은 지금도 국내 보수·진보 학자들과 예술인들 사이에서 색깔 논란이 끊이지 않는 피카소의 1951년 작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지난달 초부터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의 대표작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불타고 황량해진 전쟁터 들녘을 배경으로 화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알몸의 여인과 아이들, 갑옷 입고 총을 겨눈 장정들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빨갱이’ 낙인을 받았다. 그가 1944년 입당한 공산당원이었던 터라 당장 미군을 겨냥한 선전선동화라는 의혹이 미국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미국 영향권이던 반공국가 한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1951년 5월 발표 이후 지금까지(2000년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출품 시도가 있었지만) 한국에 들어올 엄두를 못 냈다.
1970년대 초까지 국내에선 피카소의 이름조차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가 이 작품 때문에 미국 연방수사국의 집중 감시를 받게 되고, 그 영향으로 크레파스 상표에서 ‘피카소’를 빼고, 일본에서 수입된 <세계미술전집>의 피카소 <…학살> 도판은 먹칠로 지워졌다. 90년대 이후 이 작품은 슬그머니 미술잡지에 등장했고, 2000년대 이후 인터넷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기획사 쪽도 이번 전시에 이 작품을 걸겠다고 결정할 때 주위에서 ‘섣불리 갖고 오면 큰코다친다’는 등의 만류를 받았다고 한다.
그림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진보 진영에선 전쟁의 비참함과 반전 메시지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왜 구체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적시되지 않는가 하는 불만이 제기되기도 한다. 반면 보수 진영에선 남침전쟁을 일으킨 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만행엔 눈을 감고 미군의 만행만 부각한 선전선동화라는 인식이 강하다. 일례로 이달 초 한 보수 일간지에 실린 역사학 전공 교수의 칼럼은 황해도 신천 대학살을 미군이 저질렀다는 거짓 정보를 피카소가 곧이듣고 선전화를 그렸다고 비난하는 내용을 담았다.
왜 이렇게 격렬하게 이념적 논란에 휩싸이게 됐을까. 문제는 미군의 신천 대학살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논란을 더욱 부추겼다는 점이다. 이 그림을 네이버 등 포털 등에서 검색해보면 신천 대학살을 모티브로 그렸다는 설명이 대부분 언급된다. 하지만 근거를 따져보면 명확한 게 없다.
그런데 이 문제를 연구한 정영목 교수가 지난 25일 예술의전당의 전시장 작품 앞에서 열린 ‘한국에서의 학살’ 특별대담회에 참여해 밝힌 사실들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가 대담에서 공개한, 1952년 발표된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북한 피해 현장조사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에는 신천 대학살 첫 희생자가 1950년 10월18일 발생하고, 이후 12월까지 두달에 걸쳐 3만5000명이 학살됐다고 기록에 나온다. 북한이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미국을 겨냥한 박물관을 신천에 만든 것이 1958년이다.
학계에선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를 1950년 9월께로 꼽는다. 넉달 걸려 완성한 작품인데, 공식적인 학살 피해가 북한 내부에 보고된 게 50년 10월이고,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된 건 52년 6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현장조사 보고서가 나온 시점이다. 신천 대학살과 그림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정 교수의 확고한 결론이다.
직접 북한에 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린 피카소가 50년 9월에 신천 대학살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021년 6월 국내에 70년 만에 들어온 명작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 오해를 풀 때가 됐다는 것을 절감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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