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꾀에 넘어간 日..日소재업체들 짐싸서 줄줄이 한국행
[편집자주] 2019년 7월4일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 후 2년이 지났다. 이에 자극받은 우리 기업들의 기술 자립화 노력은 소재·부품·장비 분야 경쟁력을 한단계 올려놨다. '노노재팬'으로 대표되는 일본산 불매운동도 소비자들의 행태를 바꿔놨다. 지난 2년간 대일 무역구조의 변화를 짚어보고 앞으로 갈 길을 살펴본다.
2년 전 이맘때, 나라가 망한다고 온통 떠들썩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수출을 사실상 끊으면서다. 재계는 일본이 한국 산업의 폐부를 찔렀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는 지지 않겠다. 일본을 뛰어넘겠다"며 강공으로 맞서자 정치권 일각에선 분노 대신 차분한 협상을 촉구하기도 했다.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을 가로막아 타격을 가하겠다던 일본의 전략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수출규제가 한국의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고, 일본에 대한 기술 의존도를 낮추는 계기가 됐다. 한국 시장을 휘젓던 일본 소비재 업체들이 재기 불가능한 타격을 받고 스러지고 있다. 한일 무역전쟁의 승자는 우리였다.
◇"삼성·SK 라인 멈춘다"던 호들갑, 기우였다
28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1~4월 대일본 부품·소재 수입액은 96억9600만달러(약 11조원)로 전체 부품·소재 수입 가운데 15.0%의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포인트 떨어진 역대 최저 수준이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SK머티리얼즈와 솔브레인 등 국내 기업은 불화수소 국산화에 성공했고, 포토레지스트는 유럽 공급선을 늘리면서 미국 듀폰으로부터 국내 투자를 유치했다. 불화폴리이미드 역시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양산 중이고 SKC 역시 자체기술을 확보했다.
한국에 위기를 안겨주려던 일본의 수출규제는 우리 산업에 치명타를 주지 못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라인이 멈출 것이란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오히려 우리에겐 기회에 가까웠다. 수출규제 이후 한국의 핵심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는 수입선 다변화, 기술자립, 대중소 상생협력 등을 통해 체질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수출규제 직후 곧바로 소재·부품·장비의 핵심기술 자립화를 위해 3년간 5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올해 일몰될 예정이던 소재부품특별법은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소부장특별법)으로 업그레이드돼 기술독립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기술 자립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기초원천연구 투자가 확대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R&D(연구개발) 시스템으로의 전환에도 속도가 붙었다.
◇일본 맥주 없으면 한국 식당 문 닫는다더니…
오히려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받은 쪽은 일본이었다. 한국으로 핵심 소재·부품을 수출하던 업체들은 경영난에 빠졌다. 지난해 일본이 한국에 수출한 불화수소 규모는 수출규제 이전에 비해 90% 가량 줄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불화수소 생산기업인 스텔라케미파와 모리타케미칼은 연간 60억엔(약 612억원) 수준의 매출 타격을 입었다.
한국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노노재팬' 운동은 국내 시장을 호령하던 일본 소비재 업체들도 수렁에 빠뜨렸다. 편의점 매대마다 일본 맥주가 퇴출되면서 2018년 7830만달러였던 일본 맥주 수입액은 2019년 3976만달러로 반토막이 났고, 지난해엔 567만달러로 급감했다. 한 일본 방송인이 "일본 맥주를 팔지 않으면 한국 식당들은 3일 안에 장사가 안된다"고 했는데, 일본 맥주의 대체제가 넘쳐나는 한국 시장을 모르고 한 소리에 불과했다.
10인승 이하 일본 승용차 수입액 역시 2018년 11억9130만달러에서 지난해 8억4541만달러로 줄었다. 올해 1~5월엔 3억4405만달러에 불과했다. 2019년 187곳에 달하던 일본 패션브랜드 유니클로 매장은 올해 6월 기준 139곳으로 축소됐다.
◇남은 숙제 '대일적자 축소', 결국 인적자원 싸움
그러나 전체적인 대일 무역적자는 여전하다. 올해 1~5월 대일 무역적자는 100억달러로 지난해보다 35% 늘었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꾸준히 일본과의 무역에서 200억~30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 중이다. 적자 규모로는 무역대상국 중 1위다.
일본에서 소재와 부품을 수입해 가공하는 국내 중소기업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올 1~5월 일본에서 수입한 중간재는 137억달러였다. 전체 대일 수입액 중 63% 규모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미래전략연구단장은 "대일 무역적자 개선을 위한 소부장 독립은 단순한 설비·기자재의 개선보다는 인적자원의 수준에 따라 궁극적으로 승자가 결정될 수 있다"며 "우수한 이공계 인력의 중소기업 유입을 촉진하기 위한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등 성과보상시스템에 대한 정부 지원 확대, 소부장 등 업종별 수요에 맞는 중소기업 인력양성프로그램 강화, 중소기업 R&D(연구개발)를 강화하기 위한 스마트공장 도입 등의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지난 2019년 7월 수출규제를 가한 3대 품목 가운데 불화수소가 빠르게 국산화되면서 대일본 수입액이 2년 사이 86%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와 불화폴리이미드도 국산화 작업이 진행 중이다. 2019년 실시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추가경정예산(추경) R&D(연구개발) 사업으로 무려 270건 이상의 특허가 출원됐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오히려 우리나라 소부장 분야 R&D 노력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불화수소 대일본 수입 2년새 86% 급감
28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불화수소 대일 수입액은 2018년 6686만달러(약 750억원)에서 지난해 938만달러로 2년새 약 86% 감소했다. 불화수소 대일 수입액이 1000만달러 이하로 내려간 것은 2003년 이후 17년 만이다. 불화수소 수입 중 일본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9년 32.2%에서 지난해 12.8%로 19.4%포인트 낮아졌다.
일본의 3대 수출제한 품목 중 불화수소 일본 의존도가 빠르게 낮아진 것은 국내 기업의 빠른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 때문이다. 솔브레인은 12N급 고순도 불산액 생산을 2배 확대했고 SK머티리얼즈는 5N급 고순도 불화수소가스 제품 양산에 성공했다.
EUV용 포토레지스트와 불화폴리이미드도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EUV용 포토레지스트 국내생산을 위해 미국 듀폰사와 일본 TOK사 국내투자를 유치했다. 또 국내 한 기업이 파일럿 설비구축을 마치고 시제품 테스트 중이다. 불화폴리이미드는 코오롱인더스트리와 SKC가 자체기술과 생산기반을 확보했다. 일부 수요기업은 휴대폰 생산에 국내 대체소재인 UTG(Ultra Thin Glass)를 채택했다.
정부는 이밖에도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100대 소부장 품목과 세계시장에 대비한 '338개+α'의 품목을 선정해 투자·모니터링하고 있다. 공장신증설 인허가 과정에 패스트트랙을 적용하고 전략 M&A(인수합병)도 지원했다. 수급대응지원센터에서는 7000여개사 수급동향을 모니터링하며 1205건의 애로사항을 해소했다.
◇소부장 R&D 추경 이후 2년, 특허출원 271건
소부장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R&D 투자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직후인 2019년 8월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을 마련하고 추경을 통해 2485억원 규모의 R&D 예산을 투입했다.
산업부에 따르면 R&D 사업을 추진한지 1년반만에 271건의 특허가 출원됐다. 소부장 관련 투자는 3826억원, 관련 매출은 2151억원이 발생했다. 이를 통해 385명의 일자리가 새롭게 창출됐다.
소부장 개발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두산공작기계는 최근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했던 항공용 터닝센터 장비를 국산화했다. 비행기 부품 생산에 필요한 핵심 공정을 개발한 사례다. 또 켐트로스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불소고무 단량체를 개발해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정부는 소부장 관련 차세대 전략기술에 2022년까지 7조원을 투자해 글로벌기업 100개를 육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경기 용인(반도체)과 충북 청주(이차전지), 충남 천안·아산(디스플레이), 전북 전주(탄소소재), 경남 창원(정밀기계)에 소부장 특화단지를 선정해 지원한다.
또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글로벌 기업과 공동 R&D를 추진하고 1조원 규모 소부장 펀드를 만들어 투자한다. 산업부 관계자는 "R&D 투자와 수입다변화, M&A 등을 통해 2025년까지 100대 품목 공급안정화를 추진하고 글로벌 소부장 기업을 육성하겠다"며 "5개 특화단지를 글로벌 첨단산업 기지로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 2년을 앞둔 28일 국내 중소 반도체업체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이 분야에서 거둔 적잖은 성과에 대한 뿌듯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말이다.
2019년 7월 일본이 수출규제 방침을 발표하기 전까지 국내 업체들은 해당 소재를 개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본 모리타화학공업, 스텔라케미파 등 업력이 100년에 달하는 불화수소 전문기업들의 노하우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자기불신이 팽배했다.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보여준 잠재력은 업계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SK머티리얼즈, 솔브레인 등 소재업체들은 1년이 안 돼 일본산을 대체할 제품을 개발해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로운 소재를 공정에 적용하면서 빠르게 수율(전체 생산에서 제품 출하가 가능한 고품질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을 안정시켰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돌아보면 일본의 수출규제가 약이 된 셈"이라며 "좀 더 일찍 국산화와 공급 다변화에 나서지 못한 게 안타까울 정도"라고 말했다.
◇일본 공세에 체질개선 속도…잇단 국산화 성과
지난 2년의 성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SK머티리얼즈의 초고순도 기체 불화수소 국산화다. 기체 불화수소는 반도체 기판인 실리콘웨이퍼에 그려진 회로도에 따라 기판을 깎아내는 식각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로 99.999% 이상의 고순도를 확보해야 해 웬만한 노하우 없이는 양산이 어려운 소재로 꼽힌다. SK머티리얼즈는 지난해 6월 순도 99.999%를 뜻하는 '파이브나인' 이상의 기체 불화수소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전자도 이달 초 기체 불화수소와 함께 식각 공정에 쓰이는 고순도 염화수소를 백광산업과 손잡고 개발, 반도체 설비에 적용하는 품질 테스트를 완료했다. 반도체 기판의 불순물을 씻어내는 데 쓰이는 액체 불화수소는 솔브레인과 램테크놀로리지가 대량 생산에 성공,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일본산 대신 100% 대체한 상태다.
일본이 규제품목으로 지정한 품목 중 폴더블 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불화 폴리이미드에서도 국산화 성과가 나왔다.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직후 코오롱인더스트리가 경북 구미에 생산 설비를 갖추고 양산에 들어갔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지난달 불화 폴리이미드 필름을 샤오미 폴더블폰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동진쎄미켐은 올 3월 불화아르곤 포토레지스트 국산화 개발 기록을 남겼다. 최근에는 삼성SDI가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업계의 기대가 모였다.
◇줄줄이 한국행…제꾀에 넘어간 일본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의 성과는 일본 소재업체들의 최근 행보에서도 확인된다.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를 3년째 이어가면서 오히려 애가 탄 일본 소재업체들의 한국행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 최대 포토레지스트 생산업체인 도쿄오카공업(전세계 시장점유율 25%)은 수출규제 조치 이후 인천 송도의 기존 공장에 수십억엔을 추가 투자해 생산능력을 2018년의 2배로 늘렸다. 증설한 설비는 최첨단 반도체 기술인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도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내 반도체 제조용 가스 시장의 28%를 점유한 다이킨공업은 충남 당진에 3만4000㎡ 규모의 반도체 제조용 가스 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다. 공장 건설에는 앞으로 5년간 40억엔이 투입된다. 쇼와덴코머티리얼즈(옛 히타치카세이)도 2023년까지 200억엔을 들여 한국과 대만에서 실리콘웨이퍼 연마제와 배선기판 재료 생산설비를 증설하기로 했다.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을 한국에 수출하는 기존 방식을 고수해서는 사업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어려워진 일본 업체들이 현지 생산으로 전략을 바꿔 한국기업 붙잡기에 나선 것이다.
◇대만·일본 밀착 은밀한 견제도 여전…"경계 늦출 때 아냐"
반도체 소재 공급 안정화와 국산화 성과의 배경에는 업계의 신속한 대처 외에 정부의 과감한 정책 지원과 학계의 연구 성과라는 삼각공조가 뒷받침됐다는 평가다. 다만 여전히 국내 산업계의 급소가 많은 만큼 민관 협력의 고삐를 늦춰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높다. 특히 반도체 투자에서 70~80% 비중을 차지하는 장비 분야의 자립이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최대 경쟁자인 대만 TSMC가 올 들어 일본 내 연구개발 거점 신설에 나서는 등 일본 반도체 협력사나 소재·장비업체와 밀착하는 것을 두고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업계 한 인사는 "일본의 견제가 2년 전처럼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들과 손을 잡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짚어봐야 할 지점"이라며 "소재 부문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장비 부문에서는 여전히 일본의 장악력이 크기 때문에 장기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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