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진실에도 별점을 매길 텐가

신동흔 문화부 차장 2021. 6. 2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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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루덴스 ‘별점 테러’로 봉변
댓글은 ‘양념’ 아니라 사회악
집단적 실력행사 수단으로 변질
극단적 주장 공론장서 몰아내야

광주 운암동 카페 ‘커피 루덴스’는 지난주 내내 별점 테러에 시달렸다. PC·스마트폰용 ‘카카오맵’에만 별점 532개(28일 기준)가 달렸는데 절반 이상이 최하점인 별 1개(만점 5개)였다. 이 가게 배훈천 사장이 작심하고 정부 비판 발언을 한 직후 벌어진 일. 불과 사나흘 만에 500개 넘는 평가가 달렸다. 가게에 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타고 들어와 ‘퉤’ ‘최악’ 같은 댓글을 남겼다. 여기에 맞불을 놓으려 별 5개를 남긴 사람도 많았다.

실제 가게를 방문하지도 않은 이들이 별점 한 개만 남겨놓고 간 커피루덴스 운암점 카카오맵 소개 코너

국내 모든 인터넷 별점과 댓글 게시판이 이렇지는 않다. 네이버 해당 코너의 경우, 수년 동안 쌓인 별점이 165개로 적은 편이었지만, 대부분 4~5점으로 평점이 꽤 높았고 누군가 우르르 몰려와 댓글을 단 흔적도 없었다. 알아보니 네이버는 직접 물건을 구매한 영수증 사진을 첨부한 사람만 별점을 달 수 있었다. ‘실제 방문 경험’으로 가짜들을 차단해온 것. 실명(實名)의 힘이었다.

별점은 원래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다. 원조 격인 미슐랭 가이드는 미식가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 내린 정확한 평가와 권위 덕에 호텔·영화·쇼핑 등 다양한 분야로 별점 방식 평가가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인터넷 등장과 함께 그 역할이 대중에게로 넘어왔다. 소수 전문가가 누리던 특권은 줄었고, 대중이 목소리를 얻었다.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른바 블랙 컨슈머들이 별점 테러를 벌이고, 집단적으로 ‘좋아요’를 만들어 특정 업체를 띄우는 일이 벌어졌다.

커피 루덴스 사태는 여기에 정치까지 개입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집단으로 몰려가 상대방을 무릎 꿇게 만드는 실력 행사에 꽤나 취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집단 지성’ 운운하며 꼼수를 써서라도 수적 우위를 점하면 타인의 생각까지 바꿀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벌인 일이다. 특히 선거 때 이런 이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벌써 일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게시물 업로드 구함(하루 400개)” 같은 모집(?) 공고가 올라온 것도 봤다. 이들이 ‘ΟΟΟ X파일’ 같은 글을 유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자 폭탄이나 댓글이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양념 같은 것”(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 발언)이란 생각을 가진 이 정부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조국 전 장관도 ‘광주 카페 사장님 진짜 정체’ 같은 글을 첨부해 지지자들을 선동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일부러 특정 사이트에 찾아와 댓글 올리고 별점 남기는 사람들을 의사 결정의 표본으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사람들로 표준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이 발행하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도 별점은 어떤 제품을 극도로 싫어하거나 편애하는 이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기업 의사 결정에 적합한 지표가 될 수 없다고 경고한 바 있다. 세계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 아마존이 극단적 상품평을 걸러내고자 연간 5억달러(약 5600억원·2019년 기준) 이상을 지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네이버는 실명 인증으로도 악플을 근절하지 못하자 올 하반기부터는 별점 자체를 아예 없애기로 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단 한 건의 악평이라도 소상공인이 입는 피해가 너무 크더라”라고 했다. 실제로 최근 배달 앱 쿠팡이츠에선 손님 항의를 받고 환불까지 해준 새우튀김집 사장이 별점 한 개를 받고 뇌출혈로 사망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정치는 맛집 고르고 휴가지 펜션 정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별점과 댓글의 원조 격인 인터넷 기업들까지 변화를 찾아 나선 마당에, 우리 사회의 공론장을 댓글 조작자들과 좌표 찍기 선수들의 놀이터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양념’ 운운하며 재밌어 할 일이 아니라, 사회악으로 보고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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