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수평적 조직문화'라는 허상

박지원 2021. 6. 2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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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껍질로 포장된 구악이랄까요.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하지 들여다보면 윗선의 그 누구도 '수평적'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되죠."

중견 IT기업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씨는 사내 조직문화에 대해 묻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김씨는 "아닌 척하지만 소위 '꼰대'문화 그 자체"라며 "업계 밖 사람들을 만나면 IT기업은 조직이 수평적이라 좋겠다고들 하는데 답답할 따름"이라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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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껍질로 포장된 구악이랄까요.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하지 들여다보면 윗선의 그 누구도 ‘수평적’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되죠.”

중견 IT기업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씨는 사내 조직문화에 대해 묻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김씨가 다니는 회사는 일찌감치 ‘님 문화’를 도입했고 유연하고 수평적인 문화를 강조한다. 직원들에게는 관행과 관습을 뛰어넘어 직급이 아닌 성과 창출 위주로 일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김씨가 지난 5년간 경험해온 조직문화는 회사가 강조해온 것과는 딴판이었다. 임원의 권력이 막강해서 무리한 업무 지시를 받아도 문제 제기가 불가능하단다. 회의 때마다 아랫사람 의견은 무시되고 윗선의 요구와 지시대로 결정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선배가 야근하는데 팀 막내가 먼저 가면 되겠느냐’며 야근을 종용하거나 단체 대화방에서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직원을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르는 상사도 있었다.
박지원 사회부 기자
김씨는 “아닌 척하지만 소위 ‘꼰대’문화 그 자체”라며 “업계 밖 사람들을 만나면 IT기업은 조직이 수평적이라 좋겠다고들 하는데 답답할 따름”이라고 하소연했다.

‘젊은 조직’을 표방하며 수평적 문화를 강조해온 IT업계에서 연이어 ‘불공정·직장 내 괴롭힘’ 이슈가 불거지고 있다. 네이버에서는 지난달 직장갑질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진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카오 역시 지난 2월 유사한 이유로 자살 소동이 벌어지면서 내부 평가 문제가 수면으로 드러난 데 이어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불공정·차별 논란이 이어졌다.

그간 IT업계가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조직문화를 강점으로 내세워왔기에 대중이 느끼는 충격은 크지만 해당 업계에선 예견됐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수평적 조직문화’가 허상이라는 걸 이제야 모두가 알게 됐다거나 심지어 속 시원해하는 반응도 있다.

한 네이버 직원은 “저연차 직원들끼리는 수평적일지 몰라도 중간리더급 이상은 수직적인 상명하복식 기업문화를 원한다”며 “서로 ‘님’이라고 부르지만 위계는 선명한 이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모두가 보는 사무실 안에서 소리지르며 면박하는 상사도 있었고 회식 자리에서 술 마실 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뭘까. 취재 중 만난 IT업계 직원들은 공통적으로 수평적 시스템이 조직 내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회사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게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업계의 급성장으로 조직 규모가 커지면서 수직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문화가 생겨날 틈은 느는데 기업들은 방관으로 일관한 게 조직의 지향점과 실제 조직문화 간의 부조화를 불렀다는 의미다.

불합리한 위계질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상명하복식 문화가 조직을 잠식하는 건 금방이다. 이 때문에 허울뿐인 수평적 시스템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지속적으로 혁신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IT업계를 비롯해 기업들이 직장 내 괴롭힘과 갑질 등 부조리를 잘 포착하고 개선하려는 감수성과 함께 문제 예방을 위한 철저한 관리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지 않은 채 단지 서로를 ‘님’으로 편하게 불러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헌 술을 아무리 새 부대에 담아봐야 새 술이 되지 않는다. 새 부대에 담기 전 새 술을 제대로 마련했는지부터 돌아볼 일이다.

박지원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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