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과정 불투명·부처와 중복 사업..국민참여예산 '깜깜이 편성'

안광호 기자 2021. 6. 2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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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도 첫 시행..국민이 예산 낭비 감시·사업 제안 취지
참여단, 근거 제시 없이 사업 선정..칭찬 일색 설문조사 '눈살'

[경향신문]

정부세종 컨벤션센터에서 지난 11일 열린 ‘2021 국민참여예산 제안사업 설명회’에 참석한 시민, 전문가들이 제안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국민참여예산 홈페이지

국민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예산안 심의·편성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국민참여예산제도에 국민 참여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각 부·처·청이 ‘2022년 국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요구한 사업들이 공개됐는데, 국민참여예산 홈페이지에서는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쳐 사업이 선정됐는지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고, 내실을 기하려면 국민이 제안한 사업들이 부처 요구사업이나 정부 예산사업으로 반영되기까지의 논의 과정, 집행 결과에 대한 평가 등을 제대로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요구사업 수 24%·금액 8% 증가

27일 기획재정부가 최근 취합해 공개한 ‘2022년 국민참여예산 요구사업’ 현황을 보면, 35개 부·처·청이 요구한 국민참여예산 사업은 총 190개(5843억원)로 집계됐다. 전년 요구사업 수 153개보다 24.2%(37개), 사업액은 전년 5405억원보다 8.1%(438억원) 각각 증가했다.

요구사업 중에는 생활밀착형 사업이 가장 많았다. 아동학대, 식품안전 등 사회적 관심이 높은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과 인공지능(AI) 등을 활용한 스마트 행정 사업이 다수 포함됐다. 또 장애인 저소득층, 위기 청소년 등 사회경제적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사업과 일자리 창출, 기업 및 산업 경쟁력 강화 등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한 사업도 선정됐다.

2018년 처음 시행된 국민참여예산제도는 국민이 제안한 실생활 밀착형 사업들을 예산 편성 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도입됐다. 요구사업은 크게 제안형 사업(139개)과 토론형 사업(51개)으로 구분된다. 제안형 사업은 각 부처의 적격성 심사와 민간 전문가들의 논의 등을 거쳐 선정됐다. 토론형 사업은 국민 참여형 온·오프라인 토론을 통해 발굴됐다. 이들 요구사업은 국민 2000여명으로 구성된 예산국민참여단 검토와 온라인 선호도 투표 등을 거쳐 내년도 정부 예산안 반영 여부가 결정된다. 최종 반영된 사업은 오는 9월3일까지 국회에 제출된다. 기재부는 “성, 연령, 지역별 대표성을 갖춘 일반 국민들로 구성된 예산국민참여단이 오프라인 사업설명회에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온라인 숙의를 통해 각 요구사업이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숙의와 토론이 오갔다는 국민참여예산 홈페이지를 보면 구체적인 내용이나 사업 선정의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예컨대 ‘대국민 아동학대 인식 증진’ 사업의 경우 해당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지난 1월 검토 의견에서 ‘부적격’ 결정을 내린 사업이지만, 최종적으로 부처 요구사업으로 선정됐다. ‘부적격’ 의견이 ‘적격’으로 바뀐 이유는 국민참여예산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없다.

제도 취지와 맞지 않는 특정 사업들이 요구사업에 포함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상철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은 “특수목적(음압) 구급차 보강, 희소·긴급도입 필요 의료기기 공급, 법률구조 전자접수시스템, 청소년복지시설 기능보강 지원 등은 이미 해당 부처가 진행 중이거나 혹은 관련 법령에 의해 추진해야 하는 사업들”이라며 “국민참여예산이 아닌 일반회계를 통해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가축방역 빅데이터 시스템 구축’의 경우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사업이 아니라 행정기관의 수요에 따른 사업인 만큼 해당 부처 예산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 위원은 “‘국가유공자 친환경차 지원’ 사업의 경우 이미 지방자치단체에서 친환경차 구매 지원을 하고 있는데 굳이 국민참여예산으로 또 추진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댓글엔 “좋아요” 등 단순 의견만

요구사업으로 선정되기까지 어떤 논의들이 오갔는지 보여주는 토론방에 “동의합니다” “좋아요” 등 단순 의견이 넘쳐나고 있는 것도 제도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국민 목소리를 듣겠다”며 최근 진행한 대국민 설문조사도 활발하게 운영된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내용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 전문 용어들이 많고, 문항마다 정부 사업을 칭찬하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경기회복세, 경제사회 여건 변화 등을 고려할 때 2022년도 예산안의 총지출 증가율은 어느 수준이 적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에는 총지출 증가율에 대한 설명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 올해 본예산 총지출 규모가 558조원이고, 전년 대비 증가율이 8.9%라는 배경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설문에 참여한 국민이 제대로 이해하고 답하기가 쉽지 않다.

또 다른 문항에서는 ‘우리나라는 코로나 위기에 맞서 경기 회복, 피해계층 지원 등 적극적 재정운용을 통해 주요국 대비 피해를 최소화하고, 빠른 경제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등의 자화자찬하는 내용도 눈에 띄었다.

김 위원은 “다수 국민이 참여한 제안사업들에 대해 어떤 논의가 있었고, 또 어떻게 집행됐고, 사후 평가는 어땠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며 “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민간기관이나 다양한 전문가들이 단계별 진행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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