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그 찰나의 간극이 좋다"
거친 획 휘둘러 표현한 강의 '기세'..처음 선보이는 연작 '청명'의 채색
[경향신문]
역동적인 붓질이 화면을 뒤덮는다. 강렬한 획이 쓱쓱 지나간 화면에 떠오른 새 같기도, 배 같기도 한 형상들. 누가 봐도 이강소 그림이다. 걸음을 옮기면 비슷한 듯 전혀 새로운 화면을 마주한다. 회색이나 흑백의 모노톤 회화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눈부신 색채가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20년 전 사둔 아크릴 물감을 우연히 꺼내 칠해보니 색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색이 나를 유혹한 것이죠.”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한 이강소(사진) 개인전 ‘몽유(夢遊)’에선 작가가 1990년대 말부터 2021년까지 완성한 회화 30여점을 선보인다. 이강소는 실험적인 퍼포먼스와 비디오, 설치작품으로 국내 실험미술의 최전선에 섰던 작가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화가’ 이강소에 집중한다.
“꿈속에서 놀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몽유’는 작가의 철학적 세계관을 담은 키워드다.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작가는 엉뚱하게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말문을 열었다. “각자 기억이 다르고, 경험하는 시간이 다르잖아요.” 그는 무척 자명해 보이는 세계가, 실은 꿈과 같다고 해석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오리나 배 등의 형상도 동시대적 사유에서 나왔다. “한 소장가가 제 그림을 보고, 볼 때마다 다르다고 하는 얘기가 너무 반가웠어요. 제 그림 속 오리는 오리가 아니라 오리랑 비슷한 거고, 그냥 색이나 먹칠을 한 거죠. 그려진 형상을 두고 저마다 경험에 따라 떠올리는 연상, 그 찰나의 간극을 좋아합니다.”
거친 획이 꿈틀꿈틀 화면을 휘젓는 ‘강에서(From a River)’ 연작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엄청난 기세다. “20여년 전 양쯔강을 배 타고 여행하다 큰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 마음대로 붓을 휘둘러 12점을 그렸는데 이번 전시를 하면서 갤러리에서 몇 점 더 그려 같이 놓으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해봤는데 그때 감동 없이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아 포기했어요.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작가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 ‘청명(Serenity)’이라는 회화 연작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의 호흡과 몸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획의 교차가 인상적이다.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채색의 ‘청명’은 초여름처럼 상쾌한 느낌을 준다. “그동안 기(氣), 에너지에 관심이 많아서 그것을 표현하는 데 단색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색채에 대해 반성했어요. 나를 유혹하는 색채를 찾아 충분히 색을 쓰는 실험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전시는 8월1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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