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 절반의 청산

한겨레 2021. 6. 2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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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숨&결] 이주희ㅣ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지금부터 30여년 전, 1987년 6·29 선언과 더불어 권위주의 체제가 종결되었다. 그것은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 당시 <뉴욕 타임스>가 비꼰 것처럼 “한국은 그 수많은 저항과 개헌 없이도 어차피 대통령이 되었을 사람을 힘들게 선거를 통해 뽑았다”. 그 성과는 넥타이부대로 일컬어지는 중산층의 참여와 연대로 가능한 것이었으나 독재 시기 경제성장의 큰 수혜자인 그들은 더 근본적인 개혁에 대한 지지를 일찍 거두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후에도 권위주의 정권의 유산과 행태를 이어받은 대통령을 종종 겪어야 했고, 그런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우리가 87년 체제의 한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동안 이에 반대했던 야당의 새 당대표가 탄핵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은 불완전한 87년 체제의 붕괴를 여는 놀라운 변화였다. 문제는 그 대표가 표방하는 능력주의가 87년 체제의 완전한 청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험 서열주의라 지칭되어야 마땅할 이 능력주의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불어온 신자유주의의 광풍하에 전 생애를 보낸 세대의 특징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세대와 지위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존재해왔다.

87년 체제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기 위해서는 시험 서열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의 노사관계가 갈등적이고 파행적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단 한번으로 평생의 계급이 결정되는 자녀의 시험 준비를 위해 어마어마한 교육비가 필요한 현실 때문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부진한 것도 공보육의 부족과 후진적 조직문화에 더해 자녀의 입시 준비에 엄마의 전적인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희생을 치른 부모와 자녀는 더 많은 보상을 원할 수밖에 없다. 비록 실패한 다른 이들에게 상처와 모욕을 주고 비수를 꽂는 일이 발생한다 해도.

경제의 이중구조를 고려할 때, 시험 서열주의를 주장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집단은 한정적이다. 왜 매 순간을 월드컵 토너먼트전처럼 살면서 극소수의 승자만 남는 이런 시스템에 아무리 노력해도 승리할 수 없는 다수가 동의하는 것일까? 장시간에 걸친 경험과 헌신이 직무 연관성이 떨어지는 순간의 시험 성적에 밀려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종종 발생하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질서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다면 현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페킹 오더’에 충실하게 자기보다 더 못하거나 못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에게 그간 받았던 상처와 모욕을 돌려줄 수밖에 없다.

공정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롤스의 정의론은 충분히 정의롭지 못하다. 그는 차등의 원칙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이 최소 수혜자에게 혜택이 된다면 용인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럴드 코언의 비판처럼, 만일 능력 있는 자들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해 생산적 노력을 하지 않기로 한다면 그런 노력이 불가능해서인가 아니면 그 정도 보상으로는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인가? 더 평등한 사회에서는 불평등한 사회보다 덜 보상받아도 능력 있는 자들의 생산적 기여가 가능했을 것이고 그만큼 최소 수혜자의 혜택도 증가했을 것이다.

진정한 능력주의는 모든 시민이 유사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보편적 복지와 기본소득이 보장될 때, 평생에 걸쳐 능력을 증진할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제공될 때 완성된다. 또한 능력 있는 자를 선발한다는 원칙이 이처럼 극심한 보상 격차를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높은 능력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종종 더 안정적이며 자기계발의 기회가 많다. 그 자체로 큰 보상이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우리 마음에 드는 리더를 직접 선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단점은 우리 수준을 넘어서는 리더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점이기도 하다. 훌륭한 대통령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새로운 비전을 꿈꾸며 더 훌륭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부디 공정이란 시대정신이 평등의 에토스 안에서 구현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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